[손혁재의 정치이야기⑤] 더불어민주당 새로운 40대기수론으로 뼈 깎는 쇄신을

1970년대 초 당내 파벌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모인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의원(왼쪽부터).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이 야당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젊다. ….. 국민적 지지를 받은 훌륭한 지도자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 그 지도자들의 노쇠에서 온 신체상의 장애로 두 차례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민족적 과업을 일보직전에 좌절하고만 쓰라린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69년 11월 8일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의 신민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한 말입니다. ‘노쇠’한 원로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40대기수론’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53세 김종필 공화당 의장 44세인 젊은 여당에 비해 지도부가 모두 60대였던 야당이 젊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유진산 총재 등 야당 원로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하다”며 무시하려 했지만 40대기수론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 의원이 후보경선 참여 뜻을 밝혔고, 5.16 이후 정치규제에 묶여 있다가 1967년 신민당에 참여한 이철승 전 의원도 후보경선 참여를 선언했습니다. 당시 김영삼 42세, 김대중은 45세, 이철승 47세였습니다.

40대기수론을 ‘정치적 미성년’이라고 무시했던 유진산 총재는 당원들의 호응이 커지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보지명권 요구가 김대중 의원의 반대로 무산된 뒤 유 총재는 자신과 가까운 민주당 구파 출신 김영삼 의원을 공개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당원들은 1970년 9월 29일 민주당 신파 출신 김대중 의원을 후보로 선택했습니다.

40대 후보의 등장은 지도부가 젊어졌다는 데 의의가 있지 않습니다. 여당에 끌려 다니기만 하던 무기력한 야당이 선명성을 회복하고 시민에게 평화적 정권교체의 희망을 주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김영삼 총무가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건 3선 개헌 국민투표가 통과(1969년 10월 17일)된 지 불과 3주 만이었습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공작정치 정보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베트남전쟁 파병과 한일협정으로 미국의 확실한 지지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군부의 힘을 등에 업은 강경통치에 야당은 무기력했습니다. 무기력한 정도에 그치지 않고 유착하기도 했습니다. 오죽하면 언론에서 ‘사꾸라’라 불렀겠습니까.

1964년의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언론장악 의도라며 반대하던 야당이 표결 직전 갑자기 퇴장해 버렸고 법안은 통과됐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야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정해영 의원은 ‘너 죽고 나 죽자’며 유진산 총재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유 총재가 돈을 받아먹었다고 비판했습니다.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당은 3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고 야당은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좌절했던 당원과 시민들은 선명성과 투쟁성을 약속하는 40대기수론에 호응했습니다. 야당은 제7대 대선에서는 졌지만 제8대 총선에서는 진산파동에도 불구하고 약진할 수 있었습니다.

‘야당다운 야당’에 대한 기대가 지지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시민은 안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정부여당의 잘못을 따지고, 막아내고, 대안을 제시하며 시민에게 귀를 기울이는 ‘야당다운 야당’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분당까지 거론되는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려면 더불어민주당은 뼈를 깎는 변화와 쇄신을 통해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의 40대기수론이 신민당을 살려냈듯이 더불어민주당을 살려낼 새로운 40대기수론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68세대가 물러나고 79세대가 당을 끌어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이가 젊은 지도부가 아니라 생각과 행동이 젊은 지도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당원과 지지자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고 기대를 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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