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정치이야기⑩] 1인자의 2인자 견제···박정희-김종필의 경우

김종필 총리(왼쪽)와 박정희 대통령

제21대 최다선 국회의원은 전반기 국회의장이던 박병석 의원으로 유일한 6선 의원입니다. 강제규정은 아니나 국회의장이 다음 선거에 불출마하는 관례가 20년 넘게 이어져 왔기 때문에 박 의장이 제22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면 제22대 국회 최다선은 6선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21대 국회 5선의원은 중도사퇴한 2명을 포함해 13명입니다.

역대 최다선의원은 9선으로 3명(김영삼 박준규 김종필)입니다. 8선 의원은 4명(정일형 김재광 이만섭 서청원)입니다. 7선 의원은 14명, 6선 의원은 39명입니다. 9선 의원 가운데 김영삼 의원은 제14대 대통령, 박준규 의원은 제13·14·15대 국회의장, 김종필 의원은 제11·31대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6선 의원이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정치에 입문한 다선의원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당선되었지만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다선 의원들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9선 의원 모두 신군부에 의해 정치탄압을 받았고, 정치규제로 공민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많은 정치탄압을 받았고, 국회에서 제명되어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영원한 2인자’ 김종필 총리의 정치일생도 파란만장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지만 2인자였기에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신군부 압력으로 정계은퇴했다가 재기한 뒤 3당합당을 거쳐 김영삼 정부 2인자가 되었으나 이내 쫓겨났습니다. DJP연정의 국무총리로 2인자였으나 ‘내각제’ 갈등으로 공조를 끊었습니다. 2004년 제17대 총선 낙선으로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중령 시절 처삼촌 박정희 장군과 함께 5.16쿠데타를 주도했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정보부장으로 공작정치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준장으로 예편한 뒤 민주공화당을 조직했습니다. 공화당 당의장으로 박 대통령 후계자로 꼽혔으나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장기집권을 꿈꾸던 박 대통령이 걸림돌이 될지 모르는 ‘혁명동지’를 쳐낸 겁니다.

연임을 한 박정희 대통령이 물러나면 김종필 의장이 후임이 될 것이라며 지지하던 정치인들이 1968년 5월 공화당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 의장과 가까운 정치인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입니다.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 의장은 ‘자의반타의반’이라 말을 남기고 출국했습니다.

3선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종필은 정계에 복귀했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국무총리로 임명했습니다. 김 총리 재임 중 유신체제가 들어섰습니다. 10.26 이후 공화당 총재가 되었으나 신군부 압력으로 정계를 은퇴했고 민주화 이후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3당합당에 참여했으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쫓겨나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DJP 공동정부에서도 국무총리였으나 끝내 ‘1인자’는 되지 못했습니다. ‘1인자’ 박정희 대통령은 필요한 때는 처조카 사위 김 총리에게 ‘2인자’ 역할을 맡겼지만 견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인자가 2인자와 경쟁할 일이 없는 단임제에서도 2인자에 대한 견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1인자의 권력행사에 장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집권여당 국민의힘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준석 대표 당원권이 6개월 정지되었고, 권성동 원내대표가 대표 직무대행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의원총회 추인을 거쳐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은 추락하고 있고, 국정운영 동력도 덩달아 약화되고 있습니다.

이준석 대표 재임 중 잇달아 두 번의 선거에서 이겨 정권과 지방권력을 되찾아왔습니다. 그런 당대표를 쫓아내는 게 왜 그렇게 급했을까요. 영입과정부터 후보선출, 대선운동 과정까지 윤석열 대통령과 이 대표가 갈등을 빚었지만 ‘내부총질하던 당대표’라 지칭하는 건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대표를 쫓아내려는 것처럼 보이는 건 더욱 좋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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