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파노라마⑩] 광복절 기념식 단상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도중 육영수 여사 피격 순간

“탕! 탕! 탕! 탕!”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난데없는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도중 총격전이 벌어진 겁니다. 저격범이 연단을 향해 달려 나오며 박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아댔고 박종규 경호실장과 경호원들이 응사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방탄 연설대 아래로 몸을 숙여 목숨을 건졌으나 연단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던 육영수 여사는 머리에 총탄을 맞았습니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48세였습니다. 합창단으로 참석했던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장봉화 학생이 경호원의 오발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사를 다시 읽었습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 김기춘 검사가 수사했습니다. 저격범은 재일동포 문세광으로 22살이었고 위조여권으로 입국했으며, 범행에 쓴 권총은 일본의 파출소에서 훔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문세광은 넉 달 뒤 서울구치소(지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사형당했습니다.

한일 양국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습니다. 9월에 시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다나카 총리의 친서를 갖고 방한해 사과했으나 시민의 대일감정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경희대 등 일부 대학에서 반일데모를 하기도 했습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충북 청주에 있는 세광고등학교가 학교 이름을 바꾸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문세광이 첫발을 오발해 자신의 허벅지를 쏘지 않았다면, 그리고 청중석의 세무공무원이 문세광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지 않았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유신에 대한 저항이 커지던 시기에 육영수 여사 추모분위기와 반일감정 악화로 박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반유신 반독재 투쟁은 다시 강해졌습니다.

대통령암살 시도와 육 여사 사망으로 가려졌지만 이날 경축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 3대기본원칙을 제시했습니다. 3대기본원칙은 한반도 평화정착, 다각적인 남북 교류협력을 통한 신뢰회복, 공정한 선거관리로 인구비례에 따른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이었습니다. ‘선평화 후통일’ 방식은 이후 한국정부 통일방안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대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특히 남북관계, 대일관계 등에서 중요한 제안들이 많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제43주년 광복절에 김일성을 처음으로 ‘주석’이라 호칭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습니다. 1993년 제4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 기본합의서 실천을 제안했습니다.

북한을 향해 “핵무기 개발 의혹을 해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던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말 1997년 제52주년 광복절에는 한반도 평화정착 4대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2013년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평화의 통일시대를 열어가지고 했습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남북문제나 대일외교 이외에 국정운영도 거론됩니다. 1998 제53주년 광복절에 김대중 대통령은 국난극복과 민족 재도약을 위한 `제2건국’을 제창했습니다.

2008년 제63주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미래비전을 ‘저탄소녹색성장’이라고 밝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제5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주국방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2017년 제72주년 경축사에서 평화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평화의 봄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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