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파노라마⑨] 대한민국 국회 수난사
제21대 국회 후반기 김진표 의장은 75세로 제21대 국회 최고령의원일 뿐만 아니라 역대 최고령 국회의장이기도 합니다. 종전까지는 73세에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문희상 의장(6선)이 역대 최고령이었습니다.
역대 최연소 국회의장은 54세 때 국회의장이 된 신익희 의장입니다. 제헌국회 국회부의장이던 신 의장은 이승만 국회의장이 1948년 7월 24일 두 달 만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국회부의장이어서 의장직을 자동으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1948년 8월 4일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침 신익희 의장은 1952년 7월 10일 제헌의회, 제2대 국회 전반기에 이어 세 번째로 제2대 후반기 국회의장에 뽑혔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견제로 전반기 때 2차 투표에서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던 신익희 의장이 후반기에도 2차 투표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부의장은 조봉암 윤치영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1950년 6월 19일 개원한 제2대 국회는 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개원 일주일 만에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제2대 국회 임기의 거의 대부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대구 문화극장, 부산 문화극장, 부산 극장, 부산 옛 보수동 세무서 자리 등을 전전한 피난살이 국회였습니다. 한국전쟁 중 8명이 사망했고 27명이 행방불명됐습니다.
게다가 재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관철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내각책임제를 추진하는 국회를 괴롭혔습니다. 전반기 의장단 임기가 1952년 6월 16일 만료되었는데 후반기 국회 원 구성이 7월 10일로 늦춰진 건 전쟁 때문에 사망 납치 행방불명된 의원들 말고도 30명이 넘는 의원이 출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한 발췌개헌안이 1952년 7월 4일 통과되었기에 7월 10일 후반기 국회의장단을 선출할 수 있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건 대통령직선제와 야당 개헌안을 절충해 ‘발췌개헌안’을 만들었고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가 해산될 수도 있다”며 윽박질렀던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2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7대 국회는 1967년 7월 10일 개원했습니다. 야당이 불참한 반쪽짜리 국회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선을 확보하려는 대대적인 부정선거 때문이었습니다. 제7대 국회도 수난을 겪었습니다. 야당이 부정선거에 항의하자 상임위 배정과 상임위원장 선출, 국정감사, 예산안심의 모두 여당 단독으로 진행했습니다.
야당이 등원한 건 개원 142일 만이었습니다. 어렵게 국회가 정상화되었지만 다시 8개월 동안 야당이 국회 등원을 거부했습니다. 3선개헌안 날치기 처리 때문입니다. 1년 넘게 야당이 등원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제7대 국회는 전반기 후반기 원 구성 모두 국회의장 직권으로 상임위를 배정하고 공화당 단독으로 상임위원장을 선출했던 국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