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파노라마⑧] 88올림픽 한달 앞두고 정보사 오홍근 중앙 기자 테러
1988년 8월 6일 언론인이 군 첩보기관으로부터 테러를 당했습니다. 오홍근 중앙일보 기자가 기사에 불만을 품은 육군정보사령부 장교에게 피습을 당한 것입니다. 오 기자는 마침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 덕에 목숨을 건졌는데 대검에 찔려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군인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민간인을 살해하려 했던 사건입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직선에 의해 선출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한 정치군인 출신 대통령 시절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음이 드러난 겁니다. 경찰은 사건을 축소시키려 했습니다. 경찰은 <월간중앙> 1988년 8월호에 실린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칼럼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오 기자를 혼내주려고 저지른 개인적인 테러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나마 아파트 경비원의 증언과 중앙일보에 들어온 제보로 테러범이 정보사 군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여론이 악화되고 평화민주당이 진상규명을 촉구하자 국방부가 진상을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보사 이규홍 준장 지시로 박철수 소령이 부하 네 명을 시켜 테러를 했으며, 이진백 정보사령관은 사건을 보고받고도 묵인했다는 것입니다.
군법재판 결과는 해당 공작을 모의한 이규홍 준장과 박철수 소령은 집행유예, 직접 오홍근 기자를 테러한 대위는 선고유예였습니다. “죄질로 봐서는 엄중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범행 동기가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군을 아끼는 충정에서 비롯됐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가볍기 때문에 이를 참작했다”는 겁니다.
여론의 반발과 검찰의 강력한 요구에도 오히려 고등군법회의는 이규홍 준장과 박철수 소령에게도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습니다. 테러 관련자들은 그 뒤 정보사로 복귀했습니다. 오홍근 기자 테러사건으로 민주화에 대한 수구 세력의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으며, 군도 민주화 이전에 저질렀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정치테러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해방공간에서는 많은 정치인들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백범 김구 암살사건입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현역 육군 포병소위로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인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인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부와 군 당국은 백범암살이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몰아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성명에서 한국독립당 내분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안두희가 한국독립당 노선을 둘러싸고 김구와 언쟁을 벌이다가 살해했다고 발표했던 군 당국은 7월 20일 최종 수사결과 발표에서 백범암살을 ‘안두희의 의거’로 둔갑시켰습니다.
안두희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섰다는 겁니다.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이나 특진을 했고,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했습니다. 안두희는 1992년에야 자신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개인 범행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면밀하게 준비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라고 밝혔습니다.
암살범 안두희의 1차 배후는 군부였습니다.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암살을 명령했고, 김창룡 특무대장,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 등이 개입했습니다. 이들은 일제 때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친일파였습니다. 군부의 안두희 범행 비호는 최고위층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겠지만 이 대통령의 개입이나 암살지시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백범암살은 정권 차원에서 가장 두려운 경쟁자를 제거하면서 지지기반(한독당)까지 친공이라는 색깔을 덧칠해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라 평가됩니다. 그런데 오홍근 테러는 정치인이 아닌 민간인에 대한 테러라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언론을 통제하거나 장악하려는 시도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