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한국정치④] 제헌절, 다시 헌법을 생각한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오늘은 대한민국 제헌 헌법이 제정,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제헌절입니다. 그런데 헌법 전문에는 헌법을 7월 12일에 제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이 제헌절인 건 국회가 헌법안을 가결시킨 건 1948년 7월 12일이지만 닷새 뒤인 오늘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공포하면서 헌법의 효력이 오늘부터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헌법 제정 작업은 미군정청이 남조선과도정부에 행정권을 이양한 1947년 6월 3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남조선과도정부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청이 좌우합작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정부입니다. 1947년 2월 5일 발족한 과도정부의 수반인 민정장관은 안재홍이었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입법부 역할을 했습니다.

미 군정장관의 거부권 행사로 민정장관은 무력했고 과도정부도 별 구실을 못했으나 행정권을 넘겨받은 뒤 헌법 제정 작업에 집중했습니다. 조선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편찬위에 헌법기초분과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헌법기초분과위는 미군정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이던 유진오 고려대 교수에게 초안 작성을 맡겼습니다.

5.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 국회는 개원하자마자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헌법과 정부조직법 제정을 시작했습니다. 유진오 의원을 포함 국회의원 30명이 기초위원, 각 도별 대표 9명이 전형위원, 외부 전문가 10명이 전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유진오 초안’을 중심으로 논의했고, 유진오 초안을 조금 손 본 ‘권승열 안’이 참고안으로 활용됐습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22일에 헌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했고, 국회는 7월 12일 가결시켰습니다. 7월 17일 공포와 동시에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헌법 절차에 맞춰 정부 수립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7월 20일 국회는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을 선출했고,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취임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헌법은 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특히 독재자들이 무리한 권력 행사와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을 무시하거나 마구잡이로 개헌을 추진하면서 정치사는 헌법의 수난사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발췌개헌이라 불리는 1952년 제1차 개헌은 헌법 절차를 위반한데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국회를 겁박하면서 이뤄졌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 1954년 제2차 개헌은 4사5입개헌으로 불립니다. 1표가 모자라 부결된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번복한 것으로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초대 대통령에게만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건 평등 원칙에 어긋나므로 위헌적인 개헌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3선개헌이라 불리는 1969년 제6차 개헌도 야당을 따돌리고 심야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3년 뒤 10월 유신으로 자신의 장기독재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으며 헌법상 행정권의 주체인 국무회의가 입법권을 대행한 세계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반민주적 폭거였습니다.

비상국무회의가 만든, 엄밀히 말하면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만든 유신헌법은 수많은 시민 학생의 희생을 바탕으로 고쳐졌고, 다시 6월항쟁으로 제9차 개헌이 이뤄져 현행 헌법이 등장했습니다. 현행헌법은 장기집권과 독재정치를 막기 위해 대통령 단임제와 대통령 권한 축소?국회 권한 확대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그 뒤 제6공화국으로부터 시작해 지금의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단임과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져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민이 누리는 민주주의 수준은 정부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헌법정신에 충실했느냐 무시했느냐의 차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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