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한국정치⑤] 비운의 대통령 윤보선
윤석열 제20대 대통령은 열세번째 대통령입니다. 13명 가운데 인기 있는 대통령도 인기 없는 대통령도 낯선 대통령도 있습니다. 낯선 대통령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제2공화국 첫 대통령으로 취임 10개월 만에 일어난 5.16 쿠데타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윤보선 대통령입니다. 윤 대통령은 1990년 7월 18일 오늘 9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임기간이 워낙 짧기도 했고, 그 마저도 장면 총리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밀렸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잇달아 박정희 후보에게 졌습니다. 그 바람에 정치인 윤보선이 남겨놓은 업적도, 뚜렷한 이미지도 없습니다. 오히려 박정희 장군이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를 방조했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장면 국무총리는 수녀원으로 도망갔습니다. 유엔군사령관과 미국대사가 쿠데타 저지를 위한 병력동원 허가를 요청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군통수권이 없다는 이유였으나, 군통수권자인 총리 부재 상황에서 대통령으로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쿠데타를 방조한 셈이 되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구나”라고 했다는 말이 퍼지면서 쿠데타 묵인이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구파 윤 대통령이 신파 장면 총리에 대한 반감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신·구파 갈등이 심각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윤 대통령이 쿠데타에 협조했다는 주장은 결과적으로 정치군인의 잘못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원래 민주당은 1955년 9월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이승만 대통령 독재에 맞서기 위해 만든 정당입니다. 창당 과정부터 민국당 출신과 영입파가 갈등했고 창당 뒤 구파와 신파로 갈렸습니다. 신·구파 갈등은 집권 뒤 더욱 심해져 제2공화국 몰락을 자초했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군이 사회혼란을 쿠데타 명분의 하나로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2공화국이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객관적 평가는 별로 없습니다. 5.16쿠데타 주도세력이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웠던 사회혼란이나 제2공화국의 무기력, 윤 대통령과 장 총리의 무능함이 상식처럼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우유부단한 지도자가 아니라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앞장선 강경파였습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이 계엄령을 사후 추인하고, 쿠데타 지지성명을 발표하라고 강요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쿠데타 주도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사퇴를 번복했다는 주장도 일면만 보는 겁니다. 자신이 사퇴하면 국제사회를 향해 정부의 합법적 대표자로 나설 사람이 없으므로 부득이 번복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고려하지 못한 평가입니다.
그랬던 윤보선 대통령은 10개월 뒤 대통령직을 사퇴했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정치정화법을 제정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려 한 데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또 유엔군사령관과 미국 대사의 병력 동원 요구를 거절한 데에는 국군끼리 교전하게 되면 북한이 침공하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음은 간과되어 왔습니다.
사퇴한 뒤 윤보선 대통령은 ‘산책데모’로 군정연장을 반대했고, 박정희 퇴진을 공개 요구하는 등 박정희 정권 공격에 앞장섰습니다. 명동 3.1 구국선언, YMCA 위장결혼 사건 등 민주화 운동에 빠짐없이 참여했습니다. 국정자문회의에 참여하는 등 5공에 협력했지만 윤 대통령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은 제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겠지만 이승만 대통령 때 경무대라 부르던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을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또 윤 대통령은 우표와 화폐에 자기 얼굴을 넣는 것도 반대했습니다. 5.16 때도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자신은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켜야 한다고 남았던 건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