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정치이야기⑧] 국회 고위공직자 임명동의권의 한계와 책임
국회의 본질적 역할인 ‘반대의 기능’은 대통령의 권력 행사가 빗나가지 않도록 견제·비판·감시하는 기능입니다. 국회의 권한 가운데 고위공직자 임명에 대한 동의권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하는 장치입니다.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이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아무렇게나 행사하면 안 됩니다. 공직은 대통령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직은 시민과 국가의 것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는 시민의 뜻을 제대로 헤아린 뒤에 행사되어야 합니다. 또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는 시민과의 소통 수단이기도 합니다. 인사가 잘 되면 국정운영에 대한 시민의 기대가 커지고 지지도 커질 겁니다. 잘못된 인사라면 시민은 실망하고 등을 돌리게 될 겁니다.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임명할 수 있는 공직은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 등입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방송통신위원회 위원 등의 일부는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동의도 필요 없고 국회가 선출하는 것도 아니지만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공직들도 많습니다.
오랫동안 국회의 임명 동의나 선출 과정은 형식적이었고 인사청문회도 요식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대야소 상황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했습니다. 국회가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를 제대로 견제하기 시작한 건 민주화 이후부터였습니다. 여소야대였던 제13대 국회에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부결시켰습니다.
여소야대 국회가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7표 차이로 부결시킨 건 1988년 7월 2일이었습니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은 지금까지 유일합니다.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은 131명뿐이었지만 여당 민정당에서도, 지지를 밝혔던 야당인 신민주공화당에서도 기권과 반대 무효표가 나오는 바람에 부결됐습니다.
정기승 전 대법관의 대법원장 후보 내정 사실이 알려지자 법조계와 야당이 반발했습니다. 유신독재시절과 제5공화국 때 사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시국사범 재판 등에 부당한 간섭을 일삼는 등 “정치권력에 직·간접적으로 협조했던 허물 있는 인사”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내정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습니다.
법조계와 야당이 반대했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7월 1일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을 제출했습니다.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고교-대학 직계후배이며 중앙정보부장 때 자신과 호흡이 잘 맞았다며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 일부는 반대했습니다. 어이없게도 당시 언론은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와 무효표를 묶어 ‘반란표’라 보도했습니다.
국무총리 임명동의안도 국회에서 두 차례나 부결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 신한국당이 과반 의석을 넘긴 여소야대 국회에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잇달아 부결되었습니다. 2002년 7월 31일 첫 여성 국무총리 후보자인 장상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었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28일에는 장대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 김종필 국무총리도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다고 기억하는 시민들이 있을 겁니다. 원내 과반의석을 가진 한나라당의 거부로 인준 투표가 두 차례나 미뤄지는 바람에 임시방편으로 국무총리 서리로 직무를 수행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국민의정부 첫 내각은 물러나는 국무총리가 장관 제청을 하는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날인 2월 25일에 임시국회가 열렸습니다. 한나라당이 불참해 본회의가 열리지도 못했습니다. 3월 2일에 다시 열린 임시국회는 한나라당의 공개투표로 인준투표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김종필 총리는 6개월 뒤에야 국회 인준을 받았고, 그 동안의 ‘서리 체제’에 대해 위헌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