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다부동·지평리 전투 다국적군 ‘보훈’ 더 늦출 수 없다”

랄프 몽클라르 장군 가족 <지평사모>


전적지 다부동 이어 지평리까지…6.25 기사회생 반격의 시작

다부동 백선엽 장군, 지평리 전투 미국 프랑스 군인들 공헌
지평리전승기념회 발족, 영화 드라마 웹튠 등 컨텐츠 발굴을

북한 인민군이 UN군과 한국군에 밀렸다. 첫 반격의 실마리는 다부동에서였다. 북한군은 대구 지근거리까지 몰려왔다. 낙동강 방어선의 핵인 다부동에서 한 달 여 격전이 벌어졌다.

“나를 쏴라”며 앞장서 돌진한 고 백선엽 장군에 힘입어 승전했다. 다부동 승전으로 적의 옆구리를 쳐 보급선을 끊은 인천상륙작전의 후속타도 가능했다. 국군은 승승장구 북으로 북으로 진격했다. 서울 수복에 이어 평양 탈환, 압록강까지…그러나 그해 10월 대륙의 붉은군대가 들이닥쳤다. 아군의 1.4후퇴는 처절했다. 2차 반격의 시작인 지평리 전투에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숱하다.

먼저 미군 현장 지휘관의 탁월한 작전 능력과 리더십은 눈부시고 눈물겹다. 현장에 맞는 병력배치와 그의 눈부신 리더십은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견인차였다. 혁혁한 공로를 세운 폴 프리먼은 뒷날 미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오른다.

그가 전술을 짜고 지휘한 지평리 전투는 여지껏 육사 교본에도 남겨 생도들이 배운다.

6.25전쟁 와중에 UN 깃발 아래 모인 다국적군들이 나라를 구했다. 특히 지평리 전투는 백선엽의 다부동과 달리, 미군과 프랑스군이 적을 물리쳤다. 중공군은 제공권을 움켜쥔 미군의 네이팜탄을 피했다. 낮에는 산속에 참호를 파고 숨 죽인듯 지냈다.

밤에만 귀신처럼 움직여 ‘유령부대’라 불렀다. 청천강에서 장진호까지 북녘 땅 혹독한 추위까지…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무덤’을 방불케 했다. 밤에만 출몰해 게릴라전을 펼치는 유령들에게 겁을 냈다. 전의를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도쿄 UN군사령부에서 한반도 포기나 다름없는 ‘철군론’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릿지웨이는 강성이었다. 패전의 불명예도, 그보다 더 할 철군에도 강력 반대했다. UN군의 패주 직전을 복기해보자.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에 투입됐다. UN군은 청천강 및 장진호 전투에서 참담하게 패주했고, 서울까지 중공군에게 내줬다. 

그 뒤 UN군은 평택-원주-삼척 전선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썬더볼트 및 라운드업, 킬러, 리퍼, 러기드, 돈틀리스 작전으로 진행된 반격 때부터 전술을 바꿨다.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하는 유령부대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뒀다. 종 방향 진격이 아닌 횡 방향 연결을 중요시했다. 한 번에 멀리 가는 게 아니라, 인접 부대와 보폭을 맞춰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했다.

UN군 반격에 붉은군대도 2월 공세로 맞불 놨다. 중공군은 수원 이천 원주 강릉까지 진격했다. UN군은 썬더볼트로 한강 수복 후 라운드업 작전을 폈다. 그러자 중공군이 횡성과 홍천 사이 삼마치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거다. 중공군은 지평리 주둔 UN군을 밀어내고 남한강 넘어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국군과 미군은 유령부대의 공격에 무너졌다. 단 하루 전투에 아군 7500여 명이 전사했다.

2월 초 미 9군단 우측을 엄호하러 지평리에 진주한 미 23연대 전투단. 지평리 방어를 맡은 23연대는 라운드업 작전에 편성된 전투단으로 미끼 역할을 한다.

지평리 전투 전적지

고지 아래 분지 중심에 동그란 진지를 펼쳤다. 밤에만 출몰하는 유령부대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고지에서 내려오니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신출귀몰의 신화는 더는 존속할 수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유령은 더는 유령이 아니라서다.

지평리 23연대 전투단은 미군 2보병사단 23연대와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주축. 미 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및 503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됐다. 중공군은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됐다.

23연대 전투단의 철수를 미 10군단이 8군사령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강골 릿지웨이는 사수를 명령한다. 23연대는 1.6km 길이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북쪽에 1, 동쪽에 3, 남쪽에 2, 서쪽에 프랑스 대대를 각각 배치, 전투 태세를 갖췄다. 화력이라곤 박격포와 방망이 수류탄 밖에 없던 중공군 전력을 감안해 전술을 짰다. 병력 밀도를 높이려 1.6km 길이 진지를 구축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지평리 전투는 두 명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첫째는 폴 프리먼 대령이다. 지평리 전투 당시 몽클라르의 프랑스 대대를 포함한 미 23연대전투단을 지휘했다. 부상을 입었지만 후송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싸워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한국에 온 뒤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지역 중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적은 뒤로 물러서거나 위축될 기미가 보이지 않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열정적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소. 어떤 상황에서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이오.”

그는 낙동강 돌출부의 영산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멋진 승리를 거머쥐었다.

현장에 맞게 전술을 선택하고 부하들을 존중하는 리더십으로 ‘프로’임을 입증한 것이다. 다른 한명은 랄프 몽클라르. 1, 2차세계대전에서 용맹을 떨쳐 각종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다. 육군 중장으로 전역한 바 있다. 전투에서 18번 부상하고, 18개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1개 대대 참전이 확정되자 몽클라르는 스스로 현역 당시보다 4계급 강등한다. 중령 계급으로 대대의 지휘관을 자청했다. 국방차관이 걱정하면서 만류했다. “태어날 자식에게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불퇴전의 의지를 밝힌다.

몽클라르 장군(왼쪽)

13년 전, 방한한 몽클라르 장군 딸의 회고담. “아버지는 억압받는 민족을 돕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피 흘리는 것은 군인의 신념이자 본분이라고 말씀하셨다.”

UN군 최초로 평화를 위해 파병됐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단다. 몽클라르가 이끈 역전의 대대는 백병전에서 어린 유령부대원들에게 총검을 휘둘렀다. 그 위용에 혼비백산 놀란, 어린 조선족이 많았던 중공군은 황급히 뺑소니 쳐야 했다.

중국의 팽덕회(펑더후이) 사령관이 김일성의 강한 반발에도 후퇴 명령을 내린 이유다. 지평리 전투는 다부동 못잖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가 많다. 두 영웅의 무용담을 비롯, 무수하게 많은 얘기의 보고나 다름없다.

지평리전승기념사업회가 7월 7일 지평리 미리내리조트에서 발족했다. 일단 준비위원회부터, 외부 김성회, 내부의 손백현 두분이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두분이 산파역을 멋지게 해 세상에 지평리 전승을 널리 알리기 바란다. 지평리전승기념회 발기인 모임 장소를 제공한 이광섭 미리내리조트 사장, 윤혁수 양평문화원장, 이종문 조합장과 지평 이장님까지…윤영용 총괄PD가 단디 기획해 영화, 드라마는 물론 애니메이션 웹툰까지 컨텐츠들로 멀티 유즈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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