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공군 ‘인해전술’로 대량희생, 미화할 일인가?

6.25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

전쟁은 피해야 할 비극이다. 그러나 전쟁에 확실히 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피할 수 있다. 1951년 4월과 5월에 걸쳐 6사단이 중공군 제10, 25, 27군의 3개 군을 섬멸하여 수장시켰다. 이승만은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의 휘호를 내렸다.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바다를 이룸)는 이를 말한다.

화천발전소는 박정희 시대인 1973년 완공된 29억톤의 소양강발전소가 건설되기 전까지 남한 최대 수력발전소였다. 그 이후는 주로 원자력 발전 위주다.

중공군은 일본군에 무수히 죽었다. 국공내전에서도 피해가 컸다. 이 과정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것이 1949년 10월 1일이다. 이런 일본군을 무조건 항복시킨 미군과 중공이 한반도에서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게 6.25전쟁이다.

모택동은 출병을 앞두고 수없이 노심초사했다. 중공군은 군우리와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을 일시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중공군은 미군을 쫓아 38선까지 승승장구하여 양평 지평리에서 비로소 멈추어 섰다. 자신을 얻은 리지웨이 8군사령관은 이 이후에 후퇴는 없다고 못 박았다.

1951년 5월 중공군은 춘계공세로 한국군을 몰아부쳤다. 그러나 용문산전투와 화천전투에서국군이 되살아났다. 6사단장 장도영의 공이 크다. 장병 모두의 희생에서였다. 이 시기 유명한 전투가 저격능선 전투다. 미 7사단과 국군 2사단의 9군단은 오성산을 확보한 중공군을 제압하기 위해 삼각고지-저격능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 때 오성산은 요새화되어 돌격으로 탈취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이 되어 있었다. 저격능선 전투는 마치 러일전쟁 당시 203고지 전투와 같았다.

마침내 9군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공격을 중단하였다. 9군단은 사상자 9천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도 1만9천의 손실을 입었다. 이를 중공은 상감령(上甘嶺) 전투로 기념한다. 북한은 지금도 “오성산을 장교 군번 한 트럭하고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항미원조전쟁에서 장병의 희생을 시진핑이 안다면 6.25전쟁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인해전술이 무슨 전술인가? 한국군은 초기에 여기에 압도되었지만 중공군으로서는 장병의 무한한 희생을 미화한 것일 뿐이다. 모택동, 등소평,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어 시진핑은 5세대 지도자다. 앞 세대를 잘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택동의 종신집권을 따르겠다는 망상을 버릴 수 있다.

지금 90세 이상 노인 중에는 6.25전쟁 참전자가 있을 수 있다. 1950년 당시 스무살 청년이라면 2021년에 아흔이 넘는다. 이제 6.25 참전자는 죽고 생존자 대부분은 월남전 참전자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은 “한 치의 땅도, 장병의 땀과 희생 없이는 얻어진 것이 없다”고 피맺힌 교훈을 강조했다.

전두환 시대 완공된 평화의댐이 당시를 명약관화하게 보여준다. 중공에서 온 관광객은 그때 중공군이 조금만 밀어붙였으면 통일이 되었을 텐데 하며 한국인을 놀린다. 그보다는 여기서 물고기 밥이 된 무수한 중공군 청년들의 고혼(孤魂)을 달래야 할 것이라고 응답한다.

6.25전쟁에서 피아간에 수없이 많은 청년들이 죽어갔다. 전쟁은 피해야 할 비극이다. 그러나 확실히 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전쟁을 피할 수 있다. 오늘에 이르러 6.25전쟁을 다시 면밀하게 공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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