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한국전쟁 69돌] 중공군과 최고혈투 파로호전투와 금성전투···지금은 경제전쟁?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파로호 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 2차 공세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국군6사단이 화천댐을 확보하고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을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둔 전투다.
사창리 전투에서 후퇴한 6사단은 용문산 전투에서 설욕하고 마침내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대파했다. 파로호(破虜湖)의 원래 이름은 ‘대붕호’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 전투의 통쾌한 승전보를 듣고 직접 이곳을 방문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오랑캐를 깨뜨려 수장한 호수라는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는 평화의 댐을 쌓고 파로호를 26억톤의 저수량을 가진 육지의 바다로 만들었다.
중국 사람들은 “6.25때 중공군이 조금만 더 노력하였으면 한국을 통일시켜주었을 것”이라고 한국인을 놀린다고 한다. 이에 대한 응답은 “혹시 한국에 와서 파로호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된다. 1951년 중공군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룬 현장이라고 하면 기가 죽을 것이다.
1951년 춘계공세에서 공세종말점에 이른 공산측은 휴전협상을 제안하였다. 휴전협상은 2년을 끌었다. 공산측은 1953년 6월, 2년의 휴전협상 동안 축적한 전력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한국민의 휴전 반대의지를 꺾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중공군은 3개 군(군단)으로 금성지구의 국군 2군단에 공세를 감행하였다. 6월 10일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선은 크게 흔들렸고 6월 18일에야 겨우 수습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온 세계가 경악하였다. 흥분한 모택동은 “정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한국군 1만명을 살육하라”고 명령하였다. 7월 10일 중공군 20병단은 15개 사단으로 금성천 북방에서 국군 2군단을 공격하였다, 국군방어선이 분단되고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백선엽 참모총장을 대구에서 불러올려 정일권 군단장을 돕게 하고, 경비행기로 11사단을 투입하는 등 필사적으로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에 임하였다. 7월 18일에 전선은 안정되었다. 중공군은 2만 8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국군도 1만 4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독북진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국군에 씻을 수 없는 패전의 상처를 남겨준 뒤 휴전협정 조인을 마무리하겠다”는 모택동의 공언도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모든 전투, 작전이 고비가 아닌 것이 없지만 1953년 7월의 금성전투야말로 한국의 존망을 가르는 전투였다. 금성전투 직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국민들은 금성전투의 기억이 강하지 않으나, 6.25전쟁의 전 과정에 참여했던 백선엽 장군은 금성전투가 가장 큰 고비였다고 회고한다.
금성전투는 당태종의 대군을 상대한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와 같다. 고구려와 당이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겨룬 결정적 전투가 안시성 전투였다고 한다면, 금성전투는 국군과 중공군이 모든 힘을 기울여 겨룬 전역이었다.
금성전투에 실패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함락된 것은 세계사의 큰 획을 그은다. 마찬가지로 금성전투에서 무너졌다면 한반도는 중국의 한 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파로호 전투와 금성전투는 6.25전쟁에서 중국군과 한국군이 일합을 겨룬 결전이었다. 결코 잊지 말자. 이러한 혈전은 한중간에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