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39) ‘밴플리트 탄약량’···하룻밤새 50억원 어치 포탄 퍼부어
밴 플리트 장군은 와해된 3군단을 해체하여 미 9군단과 한국군 1군단에 편입함과 동시에 미 3사단과 187공정연대를 투입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한계리에서 하진부리와 강릉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이러한 재편성 중에 밴 플리트 장군은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분량의 포탄을 발사하도록 승인하였다. 이 조치로 유엔군은 전투 간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기준량의 5배를 초과하는 포탄을 퍼부었다. 일례로 2사단 38연대를 직접 지원한 48포병대대는 24시간에 1만2000발을 발사할 정도였다. 나중에 육군성에서 너무나 많은 탄약을 사용하였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무서운 속도의 돌파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특별한 조치에 의한 화력집중에 의해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105mm포탄 한 발은 40만원이 넘는다. 포병 장병들은 포탄 한 발 쏠 때마다 ‘쌀 한 가마니 날아간다’고 한다. 48포병대대 하나만도 하루 밤에 50억원을 소모한 것이다.
이 시기의 전투로는 미군의 방카고지 전투와 한국군의 용문산 전투가 꼽힌다. 이 방면에 투입된 적 병력은 중공군 13만7000명과 북한군 3만8000명 도합 17만5000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방카 고지는 한계령 북서쪽 778고지로서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 2주 동안에 철저하게 방어진지를 구축해놓은 진지였다. 16일 밤에 중공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파상공격을 가해왔다. 유엔군 화력과 중공군 인해전술 중에서 어느 것이 강한가를 테스트하는 한판 승부였다. 중공군의 돌진을 저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보병은 진내사격을 요청하였다. 16일 밤 6시간에 이르는 진내사격으로 중공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방카고지 전투를 통하여 중공군의 대군을 격퇴함으로써 이제 반격으로 전환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장도영 장군의 한국군 6사단은 2연대를 홍천강 남안에 배치하고 2개 연대를 용문산 일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중공군 63군 예하의 3개 사단은 19일 새벽 홍천강을 도하하여 2연대를 공격하였다. 2연대는 고립된 상태였지만 전면 방어진지를 편성, 유엔 공군 및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면서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격퇴하고 2일간 거점을 고수하였다. 그동안 용문산 일대에서 반격준비를 한 6사단 주력은 중공군 포위망에 대한 역습을 실시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아 화천지역까지 진격, 중공군 절반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를 파로호(破擄湖)라 명명, 치하하였다. 이로써 6사단은 한달 전 사창리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5월 공세에서 적의 피해는 9만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전방에 투입된 적 병력의 30%로서 중공군 돌격부대는 거의 전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막대한 피해는 중공군 수뇌의 공격일변도 전략에 제동을 걸었다. 극심한 인명피해로 충격이 컸으며 그로부터 얻은 성과가 아무 것도 없는 것에 대해 당황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후 처음으로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다. 인해전술에 의해 아무리 현대화된 군대라도 격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제는 더이상 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몇 차례의 공세를 시도해 보았지만 공세에 의하여 유엔군을 격파한다든지 38도선 이남의 땅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제 유엔군은 지형과 기상, 전법에서 중공군에 대한 우세가 통하는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리지웨이가 벼랑끝 전국(戰局)을 안정시켰다면, 밴 플리트는 이제 공세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