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7) “항복을 허락한다”

수차례의 공세작전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중공군은 서부의 13병단을 뒤로 돌리고 1951년 2월 새로 도착한 3병단과 19병단, 그리고 장진호전투 이후 전력을 보강한 9병단을 전선에 투입하여 1951년 4월말 총 70만명을 전선에 전개하고 두 차례에 걸친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들은 메이데이 이전에 서울을 점령하여 유엔군의 한반도 포기를 강요하고, 최소한 휴전을 협상하기 위한 막후교섭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 하였다. 이것이 1951년 4월과 5월 2차에 걸친 중공군의 춘계공세이다.

1차 공세에서 서부의 19병단은 임진강을 도하하여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 유엔군의 진로를 차단하고 서울을 목표로 진격하며, 중부전선의 9병단은 금화-가평-수원 축선을 지향, 경춘가도를 차단한 후 서울 남쪽으로 우회 공격한다. 이로써 서울을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협공함으로써 한강 일원에서 유엔군을 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북한군이 6·25 초기에 구상하다가 춘천 전투의 실패로 차질을 빚은 기동계획 그대로였다.

2차 공세는 1차 공세와 정반대로 주공을 동부에 두고 조공을 서부에 두었다. 1차 공세에 서부에 전개하였던 두 개 병단을 중동부전선으로 전환하여 화천 이동의 공격집단을 중공군 21개 사단과 북한군 3개 사단, 도합 24개 사단으로 증강시켰다. 강원도 인제 북쪽의 9병단과 북한군 5군단을 주공으로 인제-현리-속사리 축선으로 지향, 원주-강릉간의 주보급로를 차단, 한국군 부대들을 포위, 섬멸한 다음 돌파구를 확장하면서 서부전선 측방에 압력을 가하여 유엔군의 서울 포기를 강요하려 하였다.

중공군은 4월 22일 사창리(史倉里)에서 광덕산 북쪽으로 향하는 도중 급편방어를 편성한 6사단을 공격하였다. 온정리 전투에서 경험한 “중공군에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장병은 무질서하게 후방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공격을 받은 지 두 시간 만에 사단은 완전히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이것이 전사상 유명한 6사단의 사창리 전투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를 통해 한국군의 취약점은 병력이나 병기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휘력의 결함에 있는 것이며, 특히 장교와 하사관의 질적 향상을 위한 훈련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적성(積城)에서 전개되었다. 4월 22일 임진강을 도하한 중공군 63군은 영연방 29여단을 공격하였다. 적성에서 동두천에 이르는 도로를 감제하고 있는 감악산(紺嶽山)의 운마리(雪馬里)는 가히 일부당관(一夫當關)이면 만부막개(萬夫莫開)라고 할 수 있는 방어의 요지였으나, 압도적인 중공군에 포위된 글로스터 연대는 궤란(潰亂)되고 만다. 여단장은 “자력으로 돌파가 불가능하면 항복을 허락한다”는 최후의 무전을 보냈으나, 대대는 끝까지 혈전을 벌여 622명 대대병력 중 39명만 생환하고 대대 병력 모두가 장열하게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과 29여단의 혈전으로 중공군 63군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이로 인하여 미 1군단의 좌익이 방호되어 유엔군 주력이 서울 북방 방어선으로 질서 있게 철수를 할 수 있었으며 중공군 4월 공세는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된다.?

砥平里에서 프랑스 군의 용전과 함께, 雪馬里의 글로스터 연대의 혈전은 6·25 전쟁이 미군만이 아니라 참전 16개국 장병이 모두 한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 기여한 것을 증언하는 역사다.

2차 공세에 유재흥의 3군단은 현리 전투에서 와해되어 군단이 해체되는 치욕을 당하였다. 6사단이 용문산과 홍천강을 연하는 선에서 중공군 63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도주하는 적을 화천지역에까지 진격, 사창리 전투에서 치룬 치욕을 설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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