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4) 중공군의 개입

중공군 침공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국제적 지위와 군사력을 감안하여 최초에는 작전목표를 상당히 제한하였다. 즉 유엔군의 국경으로부터의 급속한 진격을 일단 저지한 다음 상황의 진전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하되, 평양~원산선까지만 진출하고 국경지대에 완충지대를 설정하려 했다. 그 후에는 유엔군의 반응에 따라 대응조치를 취하되, 한반도로부터 외국군이 철수하고 중공이 유엔에 가입하는 정치적 목표와 연계시키려 하였다.

중공 정치국 상무위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개입을 최종 결정하게 된 것은 10월 5일께로 알려져 있다. 최종 결정을 내리기까지 모택동은 불철주야 고심하였다고 한다. 이제 세계 최강국 미국과 전쟁에 들어가는 것인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것이 불과 1년 전 1949년 10월 1일이며 티베트 공략은 진행 중이어서 개전결심은 중공으로서는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0월 10일 한국군이 원산을 점령하고 서부전선의 8군이 38선을 돌파, 평양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자, 중공은 제4야전군(사령원 임표)에 압록강의 도하를 명하였다. 이리하여 6개군 18개 사단으로 편성된 18만명의 중공군이 10월 15일 전후하여 북한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약 8주간에 걸쳐 북한으로 잠입한 중공군은 9개 군으로서 30만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이를 탐지하지 못하였다. 1949년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 이래 극동군 군사정보조직은 거의 와해되었고 1947년에 창설된 CIA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중공군은 주로 야음을 이용하여 행군하고 여명 1-2시간 전에 행군을 멈추고 은폐된 곳에서 행동을 하여 유엔 공군기의 정찰망을 피하였다. 이들은 주간에 행군을 하다가 항공기에 노출되면 산개하지 않고 그 자리에 정지해 버렸는데 이로서 비행기에서는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이게끔 하였다. 유엔 공군기가 중공군인 것을 발견하고 기총소사를 가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서방세계에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군군기였다. 중공군 지휘부에 생명의 귀중함이란 개념은 애초 없었다. 수천년 동안 중국에서 백성들은 개 돼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제1차 공세에 투입된 중공군은 4야전군의 일부로서 이천우(李天佑)의 13병단의 6개군 18만명이었다. 제2차 공세에는 4야전군의 뒤를 이어 만주로 이동한 3야전군 휘하 송시륜(宋時輪)의 9병단의 3개 군 12만명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중공군에 있어서 군은 일본군의 군과 같이 미군의 군단에 해당되며, 병단(兵團)이 서방의 군과 동급이고 야전군은 서방의 집단군에 상응한다. 당시 중공군은 5개 야전군, 217개 사단에 병력은 총 165만 명이었고 이중 언제든지 입한(入韓)할 수 있는 40만 병력이 한만국경(韓滿國境)에 포진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야전군은 독립성이 강하여 거의 군벌 수준이었다. 등소평은 국공내전 시절 제2 야전군의 정치위원을 지냈는데 이때 사령원이 유백승(劉伯承)이었다. 등소평은 유백승이 보호해주어 문화혁명기를 넘겼다. 4인방이 감히 유백승에 등소평을 내어놓으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박격포와 기관총, 소총, 수류탄이 주요 무기인 소총부대였다. 이 소총부대에 세계 최강의 미군이 녹아나는 비극이 이제부터 전개될 것이다. 문제는 지형과 기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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