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23) 맥아더의 종막은 ‘오만과 독선’이 자초했다

1950년 9월 27일 합참본부가 맥아더 장군에게 내린 북진계획승인 훈령은 다음 ‘전제(前提)와 제한(制限)’을 담고 있었다. 첫째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작전은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개시될 때까지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의사의 표명이나 실제 개입행위가 없어야 된다는 前提, 둘째 만주와 소련영토에 대한 작전은 일체 금지하며, 중·소 접경지대의 작전은 한국군에게 전담토록 한다는 制限이었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작전계획을 수립, 작명 2호로 예하 부대에 하달하였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1)8군은 주공으로서 38선을 돌파, 개성-사리원-평양 축선을 따라 공격하고 2)10군단은 주공이 공격을 개시하면 1주일 이내에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하여 교두보 확보 후, 원산-평양 축선을 따라 서부로 진출하여 8군과 연결, 적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하며 3)유엔군이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잇는 선까지 진격하면 그 이북지역에 대한 작전은 한국군이 전담한다.

10월 9일 합참은 또 하나의 훈령으로 “설사 중공군이 침공해오더라도 귀관의 판단에 따라? 북진작전을 계속하라”고 지시하여 중공군 개입 징후가 보일 때는 38도선을 돌파해서는 안 된다는 9월 27일 훈령을 백지화하였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즉각 북진명령을 하달하였다.

맥아더 장군이 8군과 10군단을 분리하여 각각 독립작전을 수행토록 한 이유는, 한반도의 지세는 태백산맥이 종단(縱斷)하여 전선의 횡적 연결이 어렵고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부산항의 보급기능이 감소되고 인천항의 보급기능도 제한되고 있어 8군과 10군단으로 하여금 인천과 원산의 2개 항을 각각 사용하게 하여 작전을 조기에 종결하려 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몇 번이나 상륙작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절용한 맥아더로서는 이런 작전을 구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는 태평양이 아니었고, 최후의 승리는 함포가 아니라 보병이 결정지었다.

맥아더의 이같은 판단과 조치에 불안해 하는 참모들도 적지 않았다. 참모장 히키 소장을 비롯하여 작전참모 라이트 소장, 군수참모 에버얼리 소장, 8군사령관 워커 중장 등 맥아더의 팔다리와 다름없는 사람들이 그와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경인지역의 10군단이 8군의 지휘 하에 서울-원산 축선으로 공격하는 것이 더 빠른 시간 내에 원산을 점령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적의 퇴로를 끊을 수 있으며, 군수지원에서도 8군의 책임 아래 전 지상군 부대를 지원하는 것이 원산항을 통하여 10군단을 지원하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지휘관에 건의, 관철해 보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Rees, Schnabel, Appleman 등 한국전 연구자들에 대한 술회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가 잘못된 다음 ‘그때 나는 사실은 이렇게 생각하였는데…’ 하는 변명은 참모로서 최악이다. 문제는 참모들이 과감한 건의를 하지 못하게 만든 맥아더의 지휘 스타일이다.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서 태평양의 시저, 일본의 將軍(쇼군) 맥아더의 권위는 압도적이었다. 맥아더가 참모총장 때 합참의장 브레들리는 소령이었고,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 교장일 때 사관생도였다. 이들이 반대하던 인천상륙작전을 보란 듯 성공시킨 맥아더의 카리스마는 하늘을 찔렀다. 아무도 8군과 10군단을 분리한 맥아더의 지휘조치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이 점에서 맥아더는 몽고메리, 패튼 등 맹장을 어거(馭車)하여 독일군을 격파한 아이젠하워, 브레들리와 달랐다. 맥아더의 종막(終幕)은 스스로의 오만과 독선이 불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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