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 그리고 김구

1946년 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하였다. 토지개혁 등 소위 대대적 민주개혁이 시작되었다. 1년 뒤인 1947년 2월8일에는 임시를 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948년 2월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건되었다. 1949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일본군 헌병대 통역이었던 김영주(김성주, 一名 김일성의 동생)를 비롯, 일제하에서 숨 쉬고 밥 먹던 사람들 가운데 일기일능(一技一能)이 있는 자는 광범위하게 등용되었다. 이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不俱戴天) 기독교인들은 38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정식 교수에 의하면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20일 북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다. 10월14일 김일성이 평양시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든 집권구상이 끝난 후였다. 그 후의 미소공동위원회니 뭐니 하는 것은 다 공연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이 제작하고 25군 정치위원 스티코프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학준 교수는 이들이 어느 정도 철저하고 치밀하게 북한정권의 건설과 운영을 지시, 통제하였는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상세하게 <미소냉전과 소련군정하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설>이라는 방대한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에는 1980년대 한국 학계에 브루스 커밍스를 소개하여 수정주의가 풍미하게 한 원죄를 덜려는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에 비해 미군정 하에서의 남한 통치는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1945년 9월9일 남한 진주 후에도 일본의 통치기구를 당분간 그대로 운영하려고 했다. 이에 기세가 오른 일본 순경은 인천에 상륙한 미군을 환영하는 민중에 질서유지를 한다면서 발포했을 정도였다. 24군단장 하지는 야전지휘관이었을 따름이고 점령통치에 아무런 큰 그림이 없었다. 국무성은 매카시가 지적하였듯 빨갱이들이 우글거렸다. (자칭 지식인들은 걸핏하면 매카시즘을 들먹이지만 매카시의 지적이 진실이었다는 것은 1990년대에 관련 정보가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2차대전의 승리를 기획한 루즈벨트의 참모장 마샬은 물과 기름인 중국에서 국민당과 중공의 합작을 도모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국무성 관료들의 중공에 대한 이해는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을 읽는 수준이었다. 이는 일본에 대해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신기해하는 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점령 통치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미국은 전후 세계를 경영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는 아마추어였다.

하버드, 컬럼비아, 프린스톤 대학에서 수학하고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보기에 이러한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는 미소의 한반도 경영의 결과는 ‘불을 보듯이 환하였다.’(明若觀火). 그는 1946년 6월 정읍 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함을 주창하였다. 백범을 비롯한 우국지사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돌리는 트집이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이때 이북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분단은 이미 실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건국선열들이 내외적으로 분투하여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립되지 않았으면 어떤 결과가 됐을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백범 김구와 우사(尤史) 김규식은 우남(雩南) 이승만의 선경명찰(先見明察)에 한참 못 미쳤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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