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2) 백마고지 전투

1952년 9월에 접어들어 중공군이 공세를 재개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였다. 백마고지(395고지)는 철원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통제하는 주요한 전초고지였다. 9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38군으로 10월 6일 밤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지를 수없이 뺏고 뺏기며, 밀고 밀리는 육박전에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손실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명의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파상공세를 계속해 왔다. 혈투는 10월 15일까지 계속되었으나 9사단은 끝내 백마고지를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38군은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여 그중 1만여 명이 전사, 전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9사단도 사상자가 3500명에 달했다. 육박전은 보병이라 하더라도 자주 치르는 것은 아니다. 미군은 육박전에 참전한 보병에게는 따로 휘장을 수여하여 영예를 높여준다.?

9사단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김종오 사단장의 적시적인 예비대 투입 및 부대 교체가 결정적이었다. 9사단은 5만5000발 이상의 포탄세례를 받았다. (전투가 끝나자 고지는 1m 정도 낮아졌다) 이러한 포화 속에서 장병들이 보여준 투지는 국군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밴 플리트 장군의 극찬을 받았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을 통하여 고지전투의 대명사였다. ‘white horse’ 백마 9사단의 영예는 6·25전사에서 길이 남는다, 9사단이 맹호 수도사단과 함께 월남전에 파병된 것도 이러한 전공으로 국군에서 전투서열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대의 긍지와 전통은 하사관을 통하여 면면히 이어지고 이것이 전투력의 근간을 이룬다.?

김종오 장군은 개전 초 6사단장으로 북한군 2군단의 진출을 저지시켰는데 이에 격노한 김일성이 군단장 김광협을 최현으로 바꾸도록 하는 춘천회전의 설계자였다. 춘천회전은 김홍일 장군의 한강선 방어와 더불어 미군 참전까지의 천금같은 시간을 버는 결정적인 승리였다.

1년 후 중공군 춘계공세에서는 3사단장으로 9사단장 최석과 함께 유재흥의 3군단을 구성하였으나, 민기식의 5사단, 김형일의 7사단 등 미 10군단에 배속된 3군단의 좌익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오마치를 중공군이 장악하자 군단 전 장병이 궤주(潰走)되어 3군단이 해체되는 현리전투의 치욕도 당했다.

그러나 1년 후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9사단장으로서 백마고지를 사수하는 공을 세웠는데, 이는 장도영 6사단장이 사창리전투에서의 패배를 용문산전투 승리로 설욕한 것과 비견된다. 이처럼 당시 30대의 청년 장군들은 한발 한발 발전해 나갔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미군의 막대한 항공, 포병, 기갑지원도 백마고지 전투의 주요한 성공요인의 하나였다. 미9군단 예하 포병은 18만 5000발의 포탄을 퍼부어 사단을 지원하였고 미 5공군은 745회를 출격, 지원하였는데 그중 야간출격만도 76회에 달하였다.

오늘날 백마고지는 서울 서부역에서 경원선을 타면 종점 백마고지역에서 내려 철원군이 조성한 안보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다. 청소년들이 이곳을 돌아보면 안보교육이 따로 필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병역 미필 장관, 국회의원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먼저 참배해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