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8) 한국군 최대 굴욕 ‘현리전투’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가 시작되던 1951년 5월 16일 밤 3군단은 현리 동쪽 가로리-가리봉 사이의 26km에 달하는 정면에 9사단을 왼쪽, 3사단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있었다. 현리는 군단 지역 내 유일한 통신 및 보급 기지이면서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도로망이 거의 없었으며 왼쪽 인접 군단인 미 10군단 지역을 통하여 주보급로와 연결되었는데, 그 사이에는 애로(隘路)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온 국토가 사통발달로 이어진 오늘날에도 별 차이가 없다. 전사를 공부하는 군인은 반드시 이 지역을 답사해 보아야 한다.

5월 16일 밤 공격이 개시되자 7사단 및 9사단은 삽시간에 무너져 후퇴하고 중공군은 그 돌파구를 통하여 군단의 후방으로 침투, 상계리 부근에서 군단의 주보급로를 차단하였다. 7사단은 17일 2시 한석산(寒石山)으로 철수하고 9사단도 오전 8시부터 철수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군단의 좌익인 미 10군단이 적에게 노출되고 주보급로마저 차단당하자 군단은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장병들은 오합지졸이 되고 차량들은 무질서하게 방치된 상태에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구 하나 상남리(上南里)에서 주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에 대해 돌파공격을 제의하는 지휘관이 없었다. 17일 군단장은 사단장들과 회동하여 수습책을 강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사단장들에만 맡기고 군단사령부로 돌아갔다. 양 사단장은 상남리에 대한 역습과 현리에서의 부대 재배치를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날이 어두어져 중공군의 현리에 대한 포위가 압축되면서 혼란은 극도에 달하였다. 지휘계통은 완전히 무너지고 장병들은 문자 그대로, 구명도생 삼삼오오(苟命徒生 三三五五) 빠져나가기 시작하였다. 3군단은 와해되었다. 5월 18일 밴플리트 장군은 3사단을 1군단에, 9사단을 미 10군단에 배속하고, 3군단을 5월 26일부로 해체하였다. 6·25 전쟁 중 국군이 당한 최대의 패전이고 치욕이었다.?

후에 밝혀진 바이지만, 중공군이 소대 병력으로 오마치(五馬峙) 고개를 점령하여 애로를 차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때 장진호에서 미 해병대가 후퇴하면서도 견부의 적을 돌파해나가면서 전진(轉進)한 착안과 정신이 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붕괴는 없었을 것이다.??

유재흥 군단장은 928수복 후 2군단을 지휘하여 북진을 하면서도 예하 6, 7, 8사단이 여러 번 인접부대 전투지대를 침범하거나 공격축선이 교차되게 하는 미숙한 작전지휘를 하였다. 이는 군단의 작전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작전의 단계화를 고려하지 않았고, 특히 공격작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수시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국군 장교들은 승전보다도, 패전 특히 현리(懸里)의 굴욕을 명심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현리전투는 한국군 장군들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공격이든, 방어든 상황이 확실한 가운데서는 용전분투하였으나, 항일전과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중공군의 유동전(流動戰)에 대해서 30대 초의 한국군 사단장과 군단장은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5년 전만 하여도 일본군과 만주군 등에서 소대장, 중대장 경험 밖에 없었던 청년장군들에게 대부대 작전을 맡겼다는 것이 무리였을 것이다. 2차 대전에서 사단장, 군단장으로 용명을 날렸던 미군 장군들에게 한국군 장군들은 이제부터 가르쳐야 될 후학들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이 이 과업을 맡아 한국군을 육성해낸다. 현리전투는 6·25전쟁 중 최대, 최악의 전투였다. 중공군 춘계공세 중에 한국군 역사상 최대의 오욕이 일어났다.?

1979년 중공군이 월남 침공시 패퇴된 것은 이에 맞먹는 것이다. 역사는 돌고도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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