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36) 3·14 서울 재탈환과 맥아더 해임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가 지평리 등에서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패퇴하자 리지웨이 장군은 작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9군단과 10군단으로 단계적 제한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2월 21일을 기하여 양평-횡성-원주-강릉 진출을 목표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정면의 적은 중공군 66군, 39군 및 40군이었다.?

2월 28일까지 8군은 횡성-원주 일대의 적을 소탕하였는데 7일간의 작전에서 5000여명의 중공군을 사살하였다. 3월 1일 8군은 37도선~38도선 중간에까지 진출하였다. 3월 14일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한강을 도하하여 3월 15일 서울을 수복하게 되었다. 통한의 1·4후퇴로부터 두 달여 만이었다. 이후 8군은 3단계에 걸친 단계별 반격(Thunderbolt, Killer, Ripper)을 감행하여 중공군과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다시 북진도 감행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8군이 38도선으로 진격하자 미 정책당국은 또 다시 38도선 이북으로의 진격 여부를 논의하게 되었는데, 트루만 대통령은 이 문제는 현시점에서 정책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작전에 속하는 것으로 맥아더 장군이 판단하여 결정하도록 지시하였다.

4월 11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전격 해임되고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52년간의 찬란한 군대생활과 영광의 마지막을 해임으로 마치게 된 것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맥아더는 그동안 여러 차례 정부의 정책을 공공연히 비난함으로써 통수권자에 도전한 행위는 충분한 해임사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문민통제라는 군사정책상의 문제와 함께 ‘작전의 실패’라는 군령상의 문제(military strategy)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서 전웅(戰雄)으로서 맥아더의 영광과 위신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북진간에 있어서 맥아더의 작전지도는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 ‘인디안 태형’과 ‘장진호의 전진(轉進)’에서 당한 패배는 미군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유엔군사령관으로서 맥아더는 어떤 방법으로든 책임을 졌어야 했다. 다행히 리지웨이를 보내는 것으로 일단 수습은 되었지만 전역사령관(戰域司令官)으로서 맥아더의 권위는 회복할 수 없이 실추되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맥아더는 은인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제는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 이와 함께 6·25가 터지자 소련의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국전에 개입하기로 결정을 내린 트루만 대통령의 영단에 대해서 보다 높은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에서 공산반군과 대적하던 군을 육성, 훈련시키던 밴플리트 중장이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8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후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전체 한국전쟁기간의 3분의 2를 담당하였고 미국 육사를 모델로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정착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 등, 한국군 육성에 진력한 공로로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맥아더, 워커, 릿지웨이, 밴플리트 등은 모두 당대 최고의 장군들이었다. 한국민은 무엇보다 이점에 대해 미국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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