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일본서 자유민주주의를 찾느니 쓰레기통서 장미를···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한국 관련 난에서 ‘우리나라(일본)와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이라는 표현을 모두 삭제하고 그냥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로만 표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과연 일본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具有한 나라인가”는 문제를 제기해보자.

민주주의는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후에 이식된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의 천황 위에 선 현인신(現人神)이었다. 군정기간 동안 일본의 국민배우 하라 세쓰코가 맥아더의 시중을 들었다. 가미가제에 놀란 미국인들이 보기에 놀랍게도 일본인은 점령군에 착한 피정복자였다. 그들은 잘 길들여진 바둑이처럼 양순하게 하나하나 민주주의의 걸음마를 배웠다.

그에 반해 한국의 민주화는 피로써 쟁취한 것이었다. 그것은 1960년 4.19혁명으로 시작되고 1987년 6.10시민항쟁으로 완결되었다. 일본의 민주화에는 그러한 처절한 기록이 없다. 타력본원(他力本願)은 항상 허약하다. 외부의 조그만 자극과 내부의 동요에도 언제고 깨지고, 흔들릴 수 있다.

중일전쟁 시작 이래 일본군들은 중국의 농민 목 베기 시합을 벌였다. 그중에도 남경학살은 30만명 이상을 척살한 것으로 온 중국인이 치를 떤다. 아무리 중국이 ‘땅이 크고 사람이 너무 많다’지만 30만명이 죽어서는 감내하기 어렵다. 이는 나치 독일의 6백만 유대인 학살과 같다. 관동군 731부대의 인체실험도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극악한 것이었다. 아베가 731 숫자가 새겨진 항공기를 타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반발은 상관하지 아니한다는 배짱을 일본 우익에 과시한 것이다. 독일에서 나치 완장을 차고 공중에 나타나면 당장 체포되어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나오더라도 독일사회에서 영구히 격리된다. 일본과 독일의 국민 수준, 윤리 의식은 이처럼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수학자이자 문화·문명비평가인 김용운 박사는 풍토와 지정학적 위치를 기반으로 한 ‘원형사관’을 제시한다. 일본에서 출생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고, 도쿄대학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하여 일본에 정통한 김용운 박사는 화산과 지진, 태풍이 많아 단결로써 재해를 이겨내야 하는 일본인은 자연히 권력에 순응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때문에 개인의 자율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생리적으로 일본인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기에 자유와 민주주의는 일본인들에게 낯선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아, 한국은 이러한 일본과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포항제철을 만든 박태준은 원래 일본에서 자랐다. 포항제철을 건설하면서도 일본의 지인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자민당의 실력자와 일본 제철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두 사람을 소개해준 사람이 관동군 참모 출신 세지마 류조였다. 소련군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와 이토추 회사의 고문으로 <불모지대>의 실존인물인 그는 진정으로 일본이 한국을 돕는 것이 일본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박태준을 도운 국사였다. 일본에는 이러한 지사가 드물게 있다. 얼어붙은 한일관계는 양국의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복구되고, 진전되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누가 뭐래도, 숙명적으로 일의대수(一衣帶水)다.

포항제철을 만든 박태준은 일본에 지인이 많았다. 제철공장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에 큰 은을 입었다. 미사일 연구를 견제하는 미국의 집요한 집념과는 대조가 된다. 박태준은 한국의 제철공장을 지원해준 지인을 꼽는 중에 세지마 류조를 든다. 그는 관동군의 참모였다.소련군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그의 시야는 넘어섰다. 한국은 일본이 일제 강점을 사죄하는 데서 진정으로 협조해주어야 한다고 보는 志士요 현대의 國士였다. 이러한 일본인과 공동의 가치를 구현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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