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일본은 ‘럭비공’, 아베는 ‘위장한 푸틴’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1936년 2월26일 일본 도쿄에서 1연대 장병 1400여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해외에 출진하지 않았던 1사단이 만주에 출동하는 것을 구실로 삼아 중, 소위들이 하사관과 병들을 충동질한 것이다. 이점에서는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등이 주도한 여순반란사건과 닮았다. 그들은 주요 육군성을 점거하고, 내무상과 대장상, 교육총감을 살해하는 한편 시종장에게 중상을 입혔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2.26은 5.16과 같은 군사정변도 아니고, 일개 반란이었다. 그런데도 군부 상층부가 이들을 궐기군이라고 부르며 토벌을 머뭇거리자 이례적으로 천황이 직접 나섰다. ‘천황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후임 수상을 천거하는 등, 중신의 피습에 격분한 천황이 토벌을 주도한 것이다.
이후 일본의 헌정은 암흑기로 들어선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사실상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과 같이 군부가 정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일련의 군부의 영향력 확대의 연장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주도한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는 승승장구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는데, 관동군의 부토오 아키라 중좌는 동경에서 날라온 작전부장 이시하라에게 “저희들은 각하가 하셨던 것을 따르고 있을 따름”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육군성, 참모본부의 위령이 먹혀들지 않는, 한마디로 통수계통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통수계통이 흔들리는 군대 같이 위험한 것은 없다.
1930년대 후반 일본군에 근무한 청년장교들은 이런 난장판 군대를 경험하고 은연중에 동경하게 된다. 박정희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憂國衷情에 불타는 청년장교는 궐기할 수 있다. 아니 궐기해야 한다는 명분과 욕구를 심어준 것이 2.26사건이었다. 박정희는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종찬 참모총장을 혁명의 지도자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정예 군대로 알려진 일본군대에 왜 이런 터무니없는 사변이 일어났는가? 1차 대전 후 전승국 일본의 자본주의가 발달되면서 사회적 분화와 대립도 진전되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을 세계 5대강국으로 끌어올린 고급장교들에 비하여 위관장교들은 사회적으로 한미한 출신이 많았다. 천황의 적자라는 자존심은 한없이 높아져 있는데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민간 정치가와 자본가들에 불만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폭발한 것이다. 거기에 육군 내부 황도파와 통제파의 갈등이 투영된 것도 중요한 계기였다.
일본이 항복한 것은 원자탄과 소련군의 침공이 직접적으로 작용했지만, 군대내 이러한 동향에 불안을 가진 간부들이 보수정권의 받침돌인 천황제를 유지하려는 의도도 작용하였다. 전쟁 말기에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일본 사회의 좌경화는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의 예민한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도 이런 부류였을 것이다.) 2.26사건은 일본 사회의 모순이 군에서 폭발한, 생각할 수도 없는 사변이었다. 일본 사회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할 필요는 이런 점에도 있다.
일본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덩이다. 미국에서는 아베는 ‘위장한 푸틴’이라는 경계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