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김종필 지론 의원내각제, 조선시대가 모델될 수 있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광해군은 선조가 몽양한 후 분조를 이끌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광해군보다 어린 인목대비에서 영창대군이 생기자 선조는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잇고자 하였다. 선조는 그 자신이 적통(嫡統)이 아니라 방통(傍統)이었다. 적통은 명종에 이르러 끊어졌다. 선조가 저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졌던 것도 적통을 잇고자하는 비원에서였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의 뜻이 천심이지만 왕조시대에는 적통이 중요하였다. 적통이 취약한 임금은 허약할 수밖에 없고, 신하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이상은 신권중심이었다. 태종에 이르러 왕권중심이 되었다. 이 체제에서는 현군이 명신을 얻으면 다행이다. 세종이 황희, 이항복 등을 얻은 것이나, 정조가 채제공을 얻은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적통의 왕이 최선일 경우는 거의 예외적이다. 왕이 항상 최선일 수는 없으나, 재상은 정교한 전형를 거쳐 이루어지니 재상을 중심으로 정치해야 한다는 것이 신권중심정치였다. 새외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선비족, 몽고족, 거란족, 여진족 등은 한족의 적통론에 매이지 않고 실력 위주로 황위를 이었다. 실력 있는 황자가 가장 눈이 정확한 황제나 귀족의 추대에 의해 황위를 잇는다는 것이었다. 대청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극성을 이룬 것은 이 덕분이다. 조선에서는 정통을 둘러싸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고 그 결과 무해무취(無害無臭)한 인물로 타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이후 천도를 결심한 것은 왜란에 의해 경복궁이 불타고 모든 것을 다시 장만해야 할 판국인데 그럴 바에야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후보지는 파주 교하였다. 왜란에 혼이 난 터라 한강, 임진강 이북에 수도를 둔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교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취는 한강 수해방지를 하기 위한 굴포천이다.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5백년 후에 이명박에 의해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최창조 박사가 통일 후 수도를 교하를 꼽은 것도 여기에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노무현의 세종시도 또 하나의 착안이었을 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에 의원들이 여섯 명이나 들어가 있어 ‘의원내각제 운용’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의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하여 내각제는 아니다. 의원내각제는 의원들이 집단책임(collective responsibility)을 지는 것이다. 모든 결정은 각의에 의해 결정된다. 각의에 따르지 못하는 각료는 사임하며, 내각이 후임을 구하지 못하면 무너진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쓰기만 하는 국무위원들로 구성된 내각은 의원내각이 아니다.

국회선진화법이라는 희한한 장치에 의해 의회가 사실상 마비되고 있다. 더구나 인사청문회를 거치느라 대통령도 야당과 흥정을 해야 된다. 혹시 우리 정부가 ‘理性의 奸智‘에 의해 장기적으로는 내각제로 가는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에서도 다양한 권력분립이 이루어졌다. 서경(署經)은 인사청문회다. 의정부(議政府)와 3司가 의회의 역할을 하고, 육조는 집행부의 역할을 했다. 이 제도는 왕이 세종이나 정조 같은 현군이면 매우 효율적으로 작용하였다. 시진핑이 중국에는 중국식의 민주주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영미의 정치제도나 철학만 따를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서도 지혜를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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