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총리는 쓴 소리 하는 자리가 아니다

‘영원한 2인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완구 총리에게 “아무래도 여성 대통령이 생각하는 게 남자들보다는 섬세하다. 절대로 거기에 저촉되는 말을 하지 말고 선행하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과 이완구 총리를 다 안다고 할 수 있는 JP만이 할 수 있는 명언이다.
총리를 흔히 영의정에 빗대어 ‘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나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영의정이 의정부를 대표하는 수상(首相)격인 것은 맞으나, 좌의정, 우의정은 영의정의 수하가 아니며 모두 영의정과 함께 의정부를 구성한다. 3정승이 다같이 정일품이다. 영의정은 지휘자가 아니라 조정자다. 영의정이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황희 정승 같이 인품과 경륜이 의정부를 이끌어 갈 수 있을 때이다. 총리의 지도력도 이와 같다.

총리는 쉽게 이야기하면 참모장이 맞다. 참모는 아무리 유능하여도 결정은 지휘관의 명의로 행한다. 현대의 칸네전투인 탄넨베르크전투는 참모장 루덴도르프와 작전참모 호프만의 구상과 지도에 따라 진행되었고 8군사령관 힌덴부르크는 이를 재가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은 힌덴부르크에 돌아가고, 그가 대통령이 된 것도 이 영광 덕분이다.(이 내막은 군인들에게만 알려졌다) 간결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이 참모장의 역할이다.

대통령과 각을 세운 이회창 총리는 총리의 한계와 역할을 전혀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회창은 판사로서는 명성을 날렸다고 하나, 그를 총리로 발탁한 것은 김영삼의 크나큰 잘못이었다. 김영삼의 서투른 인재 기용은 여러모로 국력을 소모했다. 오늘날 되풀이되는 박 대통령의 인사 실패도 총체적인 국력소모라는 점에서 안타깝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은 선비로서 기본자세다. ‘원칙의 정치가’ 조광조는 선비로서는 훌륭했으나 정치가로서는 실패했다. “임금을 신하가 내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언관(言官)으로 기용하여 대가 센 반정공신들을 견제하였다. 그러다가 소용이 다하자 내쳤다. 조광조의 토사구팽(兎死拘烹)은 정해진 이치였다. 중종의 교활한 권력정치는 정치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후 중종 명종에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로 인재가 희생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렇게 나라의 힘이 빠진 가운데 왜란이 일어나자 백성이 몽양(蒙養)가는 선조에 돌을 던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총리는 ‘쓴 소리를 하는 것’이 급한 직분이 아니다. JP의 말마따나 섬세한 대통령을 헤아려서 선행하지 말아야 한다. 정히 필요한 경우, 독대를 통하여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개선안과 변경은 반드시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JP의 각 분야에 걸친 조언은 이 사회 모두가 들어야 할 지혜다. 선진화법을 왜 만들었느냐는 남경필 의원에 대한 고언도 새겨들어야 한다. 세종시 수정안이 관철됐다면 첨단도시가 됐을 것이라는 MB의 아쉬움도 마찬가지다. 세종시에 한번 가보라. 이제 와서 어쩔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고집에 의해 앞길이 번연한 실수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를 국민으로서 간절히 바랄 뿐이다.

총리는 뜻을 모으는 자리다. 이 점에서 총리는 ‘좋은 영의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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