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군대엔 민주주의 없다!”

낙동강 전투서 워커 중장 “죽음으로?사수하라” 지시에
미 언론 “이건 비인도적이고 비민주적이다” 들끓자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군대엔 민주주의 없다” 일갈?

6·25때 기습 남침하여 서울~수원~천안~대전에서 국군과 미군부대를 잇따라 격파한 북한군 주력이 여세를 몰아 대구를 점령했다. 북한군은 연이어 부산까지 점령하여 남침전쟁을 종결하고 8월15일에 부산에서 ‘해방 5주년 기념 및 전승축하행사’를 거행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공세를 계속하는 동안 점차 국군과 미군의 방어 강도도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7월20일경 충주 수안보에 자리잡은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방문하여 “8월15일 이전에 부산을 점령할 수 없다면 해방 5주년 기념 및 전승축하행사를 대구에서라도 거행할 수 있도록 속히 대구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적은(남침 한 달 만에 중서부 남해안의 여수, 순천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중동부지역의 대구 북쪽과 서쪽 낙동강의 아군 방어선을 극복하는데 총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낙동강은 대구 북쪽과 서쪽 총 240Km의 천연장애물로 한·미연합군의 최후방어선이다. 이 방어선마저 무너져 대구를 빼앗기면 부산(항)이 기능을 상실하게 돼 UN군의 병력 및 군수물자 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어 우리의 방어전도 계속할 수 없게 되고 나라의 운명도 최후를 맞게 될 것이었다. 마침내 낙동강 방어선은 적군 13개 사단과 한·미연합군 10개 사단이 서로 밀고 밀리며 혈투를 계속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장이 되었다.

7월26일, 육군총참모장(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이 “명령 없이 전장을 이탈하는 자”를 즉각 총살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을 분대장급 이상의 지휘자(관)에게 주는 훈령을 하달하였다. 7월29일, 지상군을 총지휘하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Walker) 중장은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싸워라!”(stand or die)라는 사수명령을 내렸다.

이를 알게 된 미국 내 언론이 들끓었다. “이건 비인도적이고 비민주적이다.” 그러자 UN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나섰다. “군대엔 민주주의 없다!” 이 말 한 마디에 사태는 가라앉았다. 이 전투에서 대·소부대 지휘관들은 여기서 적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사력을 다하여 무자비하게 싸움을 독려했다. 독전에 독전의 연속이었다.

다부동 북쪽 유학산을 빼앗은 적이 8월15일 국군 제1사단 13연대(후에 15연대로 개칭) 방어지역의 328고지를 공격했다. 그 고지를 빼앗긴 연대병력이 철수해오자 눈을 부릅뜬 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그 부하들 앞에 57mm 무반동총(대전차포)을 쏘았다. 그리고 이들을 돌려세워 역습을 명했다. 그렇게 해서 끝내 고지를 되찾고야 말았다.

이런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전장에서 피투성이가 된 지휘자들과 부하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상관의 독전에 따랐다. 어느 지휘관은 공격해 오는 적에 대한 역습을 명하고 앞장서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앞으로, 앞으로!” 7월 말부터 9월15일까지 한달 반 동안 계속된 살벌과 도륙 속에 적과 아군 쌍방 모두 엄청난 병력손실을 입었다. 예컨대 다부동지역을 맡아 방어하던 국군 제1사단의 경우 북위 38도선에서 낙동강까지 싸우며 밀려 내려오는 동안 1만1000명의 사단병력이 7000명으로 줄었고 계속해서 낙동강 방어전을 치른 후에는 4700명으로 줄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병력 거의 모두가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한·미연합군은 끝내 방어에 성공했고 궤멸적 타격을 받은 적은 전투력의 고갈로 더 이상 공격해 오지 못했다. “피로써 나라를 지킨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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