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희한한 전쟁’이 낳은 ‘위대한 결과’

美 육사출신끼리 격렬하게 싸운 남북전쟁…‘자유의 나라’ 탄생

[아시아엔=민병돈 경민대 석좌교수, 전 육사교장] 1776년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은 그로부터 85년만에 내전에 돌입했다. 이른바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다. 1802년 미국정부는 허드슨강 언덕에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정규장교들을 배출해 왔다. 그런데도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합중국 군대(북군)에는 대부대를 지휘하여 적(남군)을 격파할 만한 지휘관이나 간부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간부들은 고작해야 소부대 단위로 말 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인디안 부족들을 상대로 소규모 토벌전의 전투 경험이 있을 뿐, 전쟁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남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북부는 북부대로, 남부는 남부대로 별 고민 없이 서로 승리를 장담했다. 공업지대인 북부 사람들은 “저 농사꾼 출신 반란군(남군)들이 어떻게 우리 합중국 군대를 당해낼 수 있겠느냐”고 큰 소리 쳤고, 남부 사람들은 “저 양키 놈들은 우리가 공격해 들어가면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런 와중에도 남부와 북부 어느 쪽도 전쟁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양쪽 지도자들이 사태를 전쟁으로까지 몰고 갈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1861년 4월12일 전쟁발발 당시 미합중국 상비군이 1만6000명에 불과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북 간 전쟁발발이 예상되면서 규모도 크지 않은 미합중국 군대(북군)는 남부출신들이 대거 이탈하여 남부연맹으로 옮겨감에 따라 큰 어려움을 겪었다. 부대들은 사직원을 제출하고 고향 남부로 떠나가는 대원들을 위한 송별회로 떠들썩하면서도 침울한 분위기에 싸여있었다.

전쟁발발 6일 후인 4월18일 링컨 대통령은 여러 명의 장군들을 제쳐놓고 로버트 리(Robert E. Lee) 대령에게 총사령관직을 맡아달라고 제의했지만 리 대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직서를 제출했다. “내 고향 버지니아(남부)에 칼을 겨눌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북부가 최고의 지휘관 재목을 놓친 것이다. 유능하고 덕망있는 리는 남부로 가서 남부연맹군(남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북부의 링컨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링컨에게는 처남과 동서가 4명이나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남군에 자원입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들 중 처남 벤자민 헬름은 남군의 장군으로서 전사했다. 영부인 메리도 남부의 노예제도와 연방(합중국)탈퇴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링컨은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의롭고도 외로운 대통령으로 안타깝게도 암살되고 말았다. 그가 짧은 재임 중에도 유능하고 덕망 있는 육사출신 그랜트(Uiysses S. Grant)장군을 총사령관으로 발탁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은 그가 미국역사에 탁월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는 업적이다.

민간인까지 죽이는 최초의 총력전
남부연맹의 대통령 데이비스(Jefferson Davis)와 리 장군 등 이 전쟁을 지도한 여러 장군과 고급장교들도 육사출신이다. 결국 이 전쟁은 육사(웨스트포인트) 동창들 간의 싸움, 친구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전쟁경험이 없던 이들이 재빨리 상황에 적응하고 전쟁을 경험하면서 전투지휘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쌍방 모두 용감하고 처절하게 싸웠다. 그런데 이 싸움은 민간인이 먼저 군인을 공격·살해하면서 시작되고 군인도 민간인을 죽이는 최초의 총력전(total war)으로 당시 미국 인구의 3%인 60만 젊은이들이 죽었다. 결과는 흑인노예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농업지대인 남부연맹이 링컨 미합중국 대통령이 주창한 신자유(新自由)를 받아드림으로써 끝났다.

여기에는 패자의 굴욕도 승자의 오만도 없는 관용과 사랑과 신뢰가 있을 뿐이었다. 신자유 속에 노예가 없는 평등한 시민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자유의 나라 미합중국의 탄생은 진통 만큼 그 가치 역시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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