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박헌영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아시아엔=민병돈 대기자, 전 육사교장]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면서 1945년 8월15일 항복을 발표하자 한반도의 북위 38°선이 남은 승전국 미국의 군정하에 놓였고 이때부터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까지 3년간의 해방공간은 총체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제시대 감옥에서 출옥한 후 전남 광주의 한 벽돌공장에 숨어있던 박헌영은 이러한 상항을 호기로 보고 급거 상경했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흩어져 숨어있던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그의 경쟁파벌 장안파 공산당원들을 흡수하여 조선공산당 재건과 당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테러를 자행하며 조선공산당의 존재와 위세를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경제대혼란 야기…8달만에 일망타진
여기에는 당연히 막대한 정치활동자금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그는 자금마련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하의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며 활동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잘될 리가 없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단체들의 자금마련이 경찰의 감시로 거의 불가능 했듯, 결국 공산당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박헌영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위조지폐발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일제 조선총독부의 조선은행 100원권 지폐를 인쇄하던 서울 중구 소공동소재 근택인쇄소(近澤印刷所) 직원인 공산당원 박락종(朴洛鍾)에게 그 인쇄소가 들어있는 빌딩(적산건물 敵産建物)과 그 안의 인쇄기계 등 설비 일체를 접수토록한 후 이를 조선정판사(朝蘚精版社)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박헌영은 이곳에 조선공산당본부를 두고 당기관지 해방일보사로 이곳에 입주케 하여 이곳에서 신문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9월20일 극비리에 조선은행권 100원권 지폐를 발행했다. 발행량은 6회에 걸쳐 1천200만원. 당시 화폐가치로 엄청난 돈이었다. 공산당원들은 이 돈으로 활동비를 흥청망청 뿌리며 즐거워했고 사회에는 돈이 넘쳐나 인플레가 심하여 경제혼란까지 일어나고 있으니 그들이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경찰도 만만치 않았다. 수도경찰청(지금의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崔蕓霞) 총경은 일제시대 경찰에서 조선사람으로 경시(지금의 총경급)까지 올라간 단 두 사람중 하나였다. 경험 많고 유능한 최 총경은 육감적으로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찰과의 유능한 형사들을 풀어 몇몇 공산당원들을 감시하다가 마침내 다음해 5월에 이들을 체포하며 정판사를 급습, 이들의 엄청난 범죄 전모를 밝혀내고 말았다.
이들은 똑같은 기계로, 같은 기술자가, 똑같은 종이에, 똑같은 잉크를 사용하여 위조지폐를 발행했고, 이들이 만든 지폐는 기존의 법화(法貨, Legal Tender)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법으로 규정한 발권과정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시중에 유통시켰기 때문에(법화가 아닌) 위조지폐가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범죄는 최악의 범죄로, 범행 당사자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들은 11월23일(1946년) 양원일 재판소장에 의해 피고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이관술, 박락종, 송언필, 김창선 무기징역, 신광범, 박상근, 정명환 징역 15년, 김상선, 홍계훈, 김우용 징역 10년). 최고 책임자 박헌영은 재빨리 북한으로 월북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