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중공군 6·25 개입···남북통일 꿈 코앞서 ‘좌절’

[아시아엔=민병돈 칼럼니스트/전 육사교장] 1950년, 북한의 6·25남침으로 후퇴하던 국군과 UN군이 9·15인천상륙으로 9월28일 수도 서울을 수복한 후 서부전선에서는 패퇴하는 적을 추격하며 38°선을 넘었다. 10월19일 국군 제1사단이 기동력이 우세한 미군보다 앞서 평양에 입성하였다. 동부전선에서는 미 해병 제1사단이 10월29일, 이미 국군(제1군단)이 점령하고 지나간 원산항에 편안히 상륙하여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일사천리로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를 지나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국군과 미군은 마치 부대단위 마라톤 경기를 하는 듯이 거침없이 압록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중 국군 수도사단 제26연대가 가장 먼저 압록강변 혜산진에 도착하여 그곳 강물을 마시고 압록강 물을 담은 수통 하나를 이승만 대통령께 보내드렸다. 그 후 그 연대는 압록강 선착(先着)을 기념하여 “혜산진부대”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즈음 남북한 국민은 이미 남북통일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고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 축제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느닷없이 중공군 대부대가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와 아군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년 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 중국대륙을 석권하고 10월1일(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중공 국가주석 마오저뚱(毛擇東)이 공산당 중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른바 항미원조전쟁을 결행했다. 그는 이미 북한의 6·25남침 시작 직전에 소련 스탈린으로부터 지상군으로 북한을 지원하도록 지령을 받았던 것이다. 소련은 공군으로 참전, 지원했다. 교활한 스탈린은, 소련(러시아)과 긴 국경선을 공유하고 있는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이 장차 거대강국으로 성장할 경우의 위험을 이미 계산하고 있었으며 중공의 성장을 방해할 좋은 방법으로, 중공이 이 전쟁에 참전하여 (소련의 가장 강력한 가상적국인) 미국과 혈투를 벌여 두 나라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어 국력이 약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북한의 6·25남침에 따른 우리의 반격으로 가까스로 이룬 조국통일 기회를 눈앞에 둔 우리 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은밀하게 건너온 중공군 대부대에 맞서야 했다. 엄혹한 겨울 한파 속에서 분하고 고통스러운 전면적인 철수작전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된 철수로 다음해 초 서울은 또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이른바 1·4후퇴) 아군은 평택-안성-장호원-제천-영월-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밀려났다. 그러다가 1월24일 드디어 식량과 탄약이 부족한 적군을 되받아칠 전략적 방어선을 확보하고는 마침내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3월15일(1950년) 사기충천한 아군은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지난해 9월28일 수복 이후 두 번째다. 그리고 3월말까지 모든 전선에서 38°선 일대까지 진격했고 4월 중순에는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 여기서 또 다시 중공군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온 후 4번째 대공세로 저들의 주 무기인 인해전술(人海戰術)을 펼친 것이다.

아군은 밀리고 밀어올리는 끈질긴 싸움 끝에 38°선 일대를 확보한 채 1953년 7월27일 강대국들의 의지에 따라 원치도 않은 정전(停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6·25남침전쟁 개입으로 눈앞에 닥친 조국통일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