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돈 칼럼]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에서 배울 것은?

9·15 인천상륙으로 한국전쟁 전세역전
맥아더 “적이 방심한 곳 노려야 승리”

남침 3일만인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여 기고만장한 김일성은 일사천리로 남진하여 8월15일 부산에서 해방 5주년 기념 및 전승축하행사를 거행하려고 7월말 낙동강전선에 13개 사단을 투입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리하여 대전~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주공(主攻)을 지향하며 대구 서쪽과 북쪽의 낙동강을 연한 아군 방어선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간의 병력손실을 보충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농민과 도시직장인, 학생들까지 강제로 동원하여 훈련도 시키지 못한 채 급히 전선에 투입했으니 이들이 ‘영용한 인민군 전사’가 되어 그들의 형제인 국군을 상대로 용감히 싸울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밤낮으로 계속되는 미 공군의 공습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도망병이 속출하는 상태였다.

바야흐로 맥아더가 비장의 카드를 뽑아들 때가 된 것이다. 그는 이미 저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을 때인 6월29일 위험을 무릅쓰고 흑석동 뒷산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지연전으로 시간을 끌어, 저들이 멀리 남쪽으로 내려오면 저들의 주력을 일정한 지역에 고착시킨 후 서해안 상륙작전으로 옆구리(측면)를 찔러 적을 양단(兩斷)함으로써 무력화시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륙전은 그의 장기(長技)이다. 태평양전쟁 때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점령하며 필리핀을 거쳐 일본의 코앞 오끼나와까지 상륙해 온 ‘상륙전의 귀재’가 바로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던가. 그는 도쿄의 사령부로 돌아가 인천상륙 부대를 구성할 해병대 등 일부 병력의 증원을 본국에 요청했다. 그런데 미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인천해안 상륙이 서해안의 낮은 수심과 심한 조수간만(干滿)의 차, 대규모 함정들의 정박이 어려운 협소한 항만 등 여러 악조건을 내세워 반대하며, 육군 및 해군 참모총장을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하여 그 계획을 재고하도록 요청했다. 합리적인 논리였다.

사실 한국의 서해안에서도 인천해안은 대부대의 상륙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악조건들을 두루 갖췄다. 얕은 수심에 하루 두번 있는 조수의 만조와 간조 시 해수면은 수직으로 약 10m의 차이에 수평으로 갯벌의 거리 약 6Km까지 물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감으로써 큰 선박과 상륙용 주정(보트)들의 접안과 그후 도보부대의 상륙돌격이 극히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만조 때 한정된 짧은 시간에 상륙한 선두부대들은 11시간 이상 기다려 다음번 만조 때 후속 상륙부대와 합류할 때까지 적 앞에서 고립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자칫 강력한 적 해안 방어부대의 조직적 화망에 노출되면 은폐나 엄폐할 곳도 없는 갯벌위에서 전멸당할 위험이 매우 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에서 상륙전을 지휘한 경험이 가장 많은 장군 맥아더가 그곳의 이러한 악조건들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그는 반대하는 육군과 해군참모총장들을 설득했다. “당신들의 논리는 합리적이다. 이러한 악조건은 적의 사령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인천에 상륙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해안방어부대를 강화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지리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적의 방어력이 미약한 인천에 상륙하려 한다.”

결국 반대논리를 펴던 두 참모총장들은 설득당해 돌아갔고 맥아더의 고집대로 9월15일 상륙을 결행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그때까지 적이 승리하던 6·25 한국전쟁의 전세가 일거에 역전되어 허리가 꺾인 적의 패주가 시작되었다. 과연 ‘상륙전의 귀재’, ‘세기의 노병’(당시 70세)이란 그의 별칭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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