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사무총장, 김근상 주교 등 ‘손편지’ 쓰는 사람들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연하장의 계절이 다가왔다. 이메일, 소셜 미디어 등 온라인 소통수단이 넘쳐나지만 이때만큼은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안부와 덕담을 건네고 싶다. 그러나 몸은 휴대폰과 가까워 마음만 먹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 한다. 애써 보내는 게 고작 인쇄된 안부 글귀에 자필 사인이 담긴 카드 정도. 이런 세태 속에 오랫동안 손글씨 편지를 고수하는 이들이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김근상 대한성공회 의장주교, 최명진 서울대 생활대동창회장, 오준 주유엔 대사, 민병돈 전 육사 교장,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등이 그들이다.
손글씨로 전하는 아날로그 감성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한국 외교부 시절부터 손편지를 써 온 것으로 유명하다. 국제기구 수장으로 바쁜 일과를 보내는 지금도 편지 쓰는 일을 소홀히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상기 본지 발행인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보내주신 혜신(惠信)과 동봉해 주신 책 <쿠웨이트 여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늘 잊지 않고 성원하여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시아기자협회를 창립, 열심히 정진하고 계신 데 대해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모든 사람이 다 잘사는 사회(a world better for all) 구현을 위해 큰 기여하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격려했다.
반 총장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예는 또 있다. 유엔 사무총장 연임이 확정 됐을 때 고향인 충북 음성으로 직접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돌아온 뒤 이필용 음성군수와 이종배 충주시장에게 친필로 감사편지를 보냈다. 청소년적십자(RCY) 후배 단원들의 편지에 장문의 답신을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매너 컨설턴트 허은아 예라인 대표는 “반 총장의 성공 키워드는 편지쓰기를 비롯한 세심한 매너”라고 분석한다.
김근상 주교는 성탄절을 앞두고 손수 카드를 쓴다. 국내 600명, 해외 20여개국 400명 등 1000여 명의 종교인, 지인들에게 직접 손으로 인사말을 적는다. 12월 초부터 매일 밤 2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해 상대방의 얼굴을 생각하며 쓴다고 한다. 김 주교가 보내는 성탄절 카드 표지엔 기쁜 소식, 사랑의 섬김, 불의한 사회의 변화, 창조의 보존 등 성공회 선교정신이 적혀 있다.
4년째 서울대 생활대동창회를 이끌고 있는 최명진 회장은 ‘편지리더십’으로 통할 정도로 손편지를 즐겨 쓴다. 회장 취임 뒤 첫 동창회 모임에 참석한 회원 180명 모두에게 손편지를 써보내 감동을 주기도 했다. 우경자 인하대 명예교수는 “생일축하는 보통 은행이나 보험회사에서 사무적으로 오는 인사가 먼저였는데 최 회장의 카드를 받고 이런 것이 한 조직을 지혜롭게 이끄는 힘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형근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의 부인인 최 회장은 정 전 이사장의 국회의원 시절 가장 많은 손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최 회장은 “인쇄된 편지는 선거법 위반이고 손으로 쓴 편지만 허용돼 있어 지역구 여성들에게 하루종일 수백 통의 편지를 썼다”며 “돌이켜 보면 가장 좋은 선거운동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못 잊을 편지는 딸 낳았을 때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던 남편이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아들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수고했오”라고 보낸 봉함엽서. 최 회장은 “손으로 쓴 편지는 그 사람의 인품을 읽을 수 있고, 쓰는 사람의 감정이 묻어나 그 사람이 편안한지, 걱정이 있는지, 가족 간에는 잘 있다는 편지내용임에도 글씨를 보면 진위가 느껴진다”며 손편지 예찬론을 펼쳤다.
편지지·봉투까지 직접 만들어 쓰기도
오준 대사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만든 카드에 손글씨를 담아 지인들에게 보내고 있다. 싱가포르 대사를 지낸 2010년부터 연말마다 싱가포르 거리와 대사관저 등을 유화로 그려 싱가포르 총리, 장관, 유엔본부 직원 등 20여 개국 지인 1000여 명에게 보냈다. 오 대사는 “한분 한분 받는 사람을 떠올리며 인사말을 쓰다보면 그분과 나눈 한해를 돌아보게 돼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이 된다”고 말했다. 주유엔 싱가포르대사와 외무부 차관을 지낸 키쇼르 마부바니 리콴유스쿨 대학원장은 “오 대사가 직접 그린 그림을 담은 연하장도 놀라운데 바쁜 시간에 친필로 인사말까지 써서 보내줘 감격했다”고 이메일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민병돈 경민대 석좌교수는 평생 편지를 자필로만 보냈다. 민 장군은 “헤아려보니 지금까지 5000통 가량 편지를 쓴 것 같다”며 “군 지휘관 시절에도 당번병이나 부관들한테 시키지 않고 직접 써서 보냈다”고 했다.
그는 스승이나 웃어른께는 붓펜으로, 친구나 후배들에게는 만년필과 사인펜으로 편지를 쓴다. 그는 “현역시절 부하들에게 보내는 지휘서신도 직접 펜으로 썼다”며 “편지의 기본은 정성인데, 인쇄기나 컴퓨터로 찍어낸 편지는 성의나 정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도 자필 편지를 즐겨 쓰는 사람 중 하나다. 한국인 최초 인터폴 집행위원이기도 한 김 전 총장은 편지봉투부터 편지지까지 손수 제작한 것을 사용해 정성이 더욱 돋보인다. 김 전 청장은 “1982년부터 주로 경찰 선후배들에게 매년 500통 정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답신은 20%가 이메일로 오고 손편지 답장은 몇 통 되지 않는다고 한다.
눈꽃송이 송송 날리는 겨울이다. 짝사랑 그(녀)에게 밤새워 편지 쓰던 그때를 회상하며 지인들에게 온기를 전해 보는 건 어떨까. 마침 12월31일까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이중섭이 말년에 가난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던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전시하는 행사가 열린다. 이중섭의 작품이 담긴 무료 엽서에 내용을 적으면 발송까지 무료로 해준다고 하니 이곳에 들러보는 것도 2013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