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아, 옛날이여···”고달팠지만 행복했노라, 나의 인생”

인생의 여로란 사랑의 미로이련가.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세상의 미로여.” 동무야! 끄떡없이 울컥 까닭 모를 눈물 흘리지 말고. 다음에 만나면 같이 부르자. 목 덜 쉬는 노래.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40여년 전 필자가 공직에 첫 발을 디딜 때 일이다. 서천 군청 수습을 거쳐 서산군청에서 통일벼 보급과 농가지붕 개량사업을 맡았다. 통일벼는 지나가며 눈에 보이는 곳과 한 길가 논부터 심어나갔다. 정작 농민들은 밥맛없는 쌀이라며 뒷짐을 지고 수확량을 늘리려고 면사무소 직원이 심다시피 했다. 그걸 통계 잡아 도청에 진척상황 보고하는 게 내 업무 중 하나였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며 마을 진입로를 넓히고 포장도 하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꿨다. 그 과정을 사진 찍어 도청 경진대회에 나갔다. 거기서 우승하면 전국대회에 나가고 그랬다. 그러다가 부산으로 발령 났다.

서면 로터리 서북방향에 사무실이 있었다. 직책은 부산진 구청의 살림 사는 부서의 과장이었다. 당시 구청장은 전영소 이사관으로 경남 출신, 부청장은 이북 출신의 김덕후 서기관이었다. 동생이 신부였다. 부청장이 묵는 여관 앞방에 거처를 마련했다. 젊은 과장 혼자 지내게 놔두면 사고 나기 쉽다 해서 취해진 배려다. 당연히 숙식비 일체는 각자 부담했다.

새벽 5시면 깨우셨다. 산보다! 산보? 이 새벽에? 성지곡 유원지 입구까지 걸어서 다녀왔다. 왕복 한 시간 반 걸렸다. 조깅 모르던 시대의 조깅 선구자. 힘들다 하면 올 때는 새벽버스 탔다. 돌아오면 냉수샤워.

사람의 면모가 깨끗해졌다. 출근시간까지 여유 만만, 느긋했다. 눈 비비며 일어나 불평하며 따라나선 김덕후 부청장께 배운 새벽 습관은 이후 직장생활 내내 이어졌다.

깨닫게 하는 직장

반년 후 서면 반대편 청으로 이동했다. 그곳 청장은 별명이 장 총통이었다. 서류 속에 있어야 할 게 없으면 서류가 날라갔다.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집어서 결재 받고 나왔다. 우치홍 과장은 그대로 놔두고 나왔다.

점심시간에 장 총통 테이블 근처에는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나는 타향사람이라 점심약속도 별로 없었다. 청장 옆에 앉아 밥 같이 먹었다. 이런저런 인생 얘기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 커피까지 함께 마셨다. 얻어 듣는 교훈도 적지 않았다.

그때 그런 생각은 했었다. 윗사람이 심술 안 부리면 수우미양가의 ‘우’(優)는 될 거라고 했다. 하기사 만점짜리 상사가 어디 있는가. 독재자 아니면 사람좋다는 소리 듣기 십상인 우유부단한 상관되고 만다.

군대 마치고 잠시 놀던 때. 고등학교 1년 후배 종안이가 이왕지사 자기 형 회사에서 일하면 어떠냐 했다. 고마운 제의, 해운회사였다. 일본에서 석유화학제품 싣고 왔다. 울산에서 벤젠 싣고 일본으로 갔다.

서울에서는 영업을 했다. 우리 배 이용해 달라며 저녁에는 술집으로 고객 모셨다. 군대에서도 배우지 못한 술, 호텔 꼭대기에서 양주를 마셔댔다. 취하지 않으려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다시 마셨다. 상대방이 떨어지면 끝냈다. 주객(酒客)으로 등극했다.

부산지사에서 일하는 기회도 있었다. 배가 입항하고 출항하려면 거쳐야 하는 관청 많았다. 서류마다 봉투에 수수료 넣어 제출했다. 도장 일일이 받아 배 부두에 대고 나가게 했다. 그 민원창구에 앉아 있는 이들, 여기는 누구 백이고 저기는 누구 백이라 했다. 자리와 배경과 돈. 얼마 후 공무원 돼서 받은 월급 3만4백원. 적긴 적었다. 그래도 그렇지. 공무원이 그래서야.

왜 그리 불러댔나

북한 게릴라 부대가 청와대 뒤까지 왔던 1968년 1월21일. 단성사에서 영화 보다 알았다. 2월1일 입대. 논산훈련소를 거쳐 장암리 부대에서 이등병으로 군대생활을 개시했다. 같이 발령받은 동기가 한일수.

부산 출신. 초등학교 나오고 편물공장 취직. 가족 먹여 살리다가 군대 들어 왔다. 글씨 잘 썼다. 책은 6년만 끼고 다녔다는 녀석이 정말 글씨체가 좋았다. 인사참모부에서 상장 쓰곤 했다. 나의 바로 위는 장병근. 병근 형은 일등병인데 상병 계급장 미리 달고 있었다. 군대 오기 전 부산 적기 우암동 네거리 2본 동시상영관 보조 영사기사였다. 착실했다. 지금도 내가 존경한다.

제대특명 받은 병장들 제대가 모두 취소됐다. 1.21사태로 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된 탓이다. 그 불똥이 어디로 튀겠나. 매일 밤 줄빳따 맞았다. 1년은 족히 얻어터지며 복무했다. 이홍제, 그는 밤마다 전국체전 도대회 출전경력의 복싱실력을 졸병 상대로 발휘했다. 남문우는 이홍제 밑 군번이었다. 너무 때린다며 대신 맞겠다고 나서기 한두 번 아니다. 직사하게 얻어 터졌다.

제대하고 만난 선임하사 김 상사님. 태릉 서울공대 가다가 만났다. 생선상자 자전거 뒤에 싣고 가고 있었다. 직업군인의 나중이 이래서야! 이발하기 싫어하고 구두 닦기 싫어했던 나. 도망가지 못하게 어께 잡고 이발소 데리고 가시곤 했다. 제발 구두 좀 닦고 옷도 좀 줄여서 입으라 신신 당부하셨다. 어디 내가 그대로 하나. 보급계 길수 형이 아예 맞는 거 골라 주느라 고생!

우리들의 군대-나의 병영이었다. 팔호 형이 저번에 밥 먹으며 말했다. “내 형제 일곱이 다 군대 갔다. 내 아들 둘 다 군대 갔다.” 형! 수효로는 형한테 지지만 우리 집도 그렇습니다.

일수와 병근 형 만나면 악 썼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함께 젓가락으로 상 두드리며 박자 맞췄다.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순신 동상 앞에서 서부전선 이상 없다며 오줌 싸기도 했다.

나이 좀 드니까 이내 목 쉬드라

그게 전방 근무 사병의 후방을 향한 반감. 뭐 그런 거 아니었겠나. 아직도 기다리는 마음. 좋아한다. 시인이 시 못 쓰는 일상에 절망. 연탄난로 발길로 걷어차 입은 화상. 그로 인해 결국 서른한 살에 이승을 떴다. 김민부. 초랑 사람이다. 그가 쓴 시다.

산복도로를 동쪽으로 내려가면 완월동이 나왔다. 어디로부터 어디를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진열장 안에 앉아 있는 여인들의 사연. 얼마나 서글플까. 그런 생각하며 지나치곤 했다. 부대 마을 식당에서 일하던 그녀들과 같은 사연일 터이다. 동생 위해서. 집에 몇 푼이라도 더 벌어 보내려고. 그러다가 여기가지 온 걸 거라고.

살면서 세상 그런 사정 이런 형편 조금 조금 알아 나간다. 그러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납득 안 되고 궁금한 건 수첩에 기입한다. 세상을 그 조그만 수첩에 어찌 다 적어 넣겠는가. 누군가 또 메모해 보탠다. 그리고 힘 모으면 조금씩 개선된다. 발전한다.

주위 둘러본다. 강남에 아파트 하나 가지고 있는 이 드물다. 거의 없다. 군대 안 간 이 없다. 돈 욕심내고 공직 판 이도 없다. 일생 연금 하나 바라고 깨끗하게 살아온 이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불가해(不可解). 착한 이들을 건드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자들이 그런다.

인생의 여로란 사랑의 미로이련가. 그토록 다짐을 하건만 인생은 알 수 없어요.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세상의 미로여. 동무야! 끄떡없이 울컥 까닭 모를 눈물 흘리지 말고. 다음에 만나면 같이 부르자. 목 덜 쉬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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