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팔선생의 고금인생] 혁명전 파리경찰청장의 ‘매관매직史’

봉건귀족은 점점 밀려나고 미천한 촌놈들이 권력을 쥐락펴락 한다. 언제부터 그리 됐나. 눈꼴 시어 이거 어디 견디겠나. 세상 돌아가는 꼴이 생시몽(Saint-Simon) 공작의 속을 긁어댄다.

그는 작가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은 조카의 아들이다. 은거하면서 회상록(memoires)을 썼다. 그 속에 당대 인물 2350명이 등장한다. 인명사전과도 같다. 17, 18세기를 그와 함께 살아온 이들을 기록했다. 느낀 게 있었다. 광대한 토지를 바탕으로 권세를 휘두른 봉건귀족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서 깊은 신분의 몰락 징후였다.

법조귀족이 권력을 장악하다 대신 ‘미천한 시골출신’ 신진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법원을 중심으로 포진했다. 법관이었다. 프랑스 절대주의의 치세 담당세력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종래의 귀족은 장원을 소유했다. 유사시 칼 들고 나가 싸우는 검의 귀족이다. 새로운 권력자는 법전 법전이 무기다. 법복 입은 귀족이다.

매관매직으로 귀족 간 세력 균형

그들은 귀족도 성직자도 아닌 제3계급의 자손이다. 토지귀족이나 대법관이나 도시 엘리트와는 연줄이 없다. 돈 벌기에 성공한 시골부자 집안의 아들이었다. 돈 많은 이의 출세 방법은? 관직을 돈 주고 산다. 매관이다. 법관 자리를 샀다. 귀족 칭호도 얻어냈다. 특권도 챙겼다.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까지 유럽 왕국은 국가사업을 민간위탁으로 했다. 세금징수는 청부업자가 맡았다. 국방업무는 용병대장에게 용역 주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작은 정부’다.

징세업자는 일 따려고 별 수단을 다 동원했다. 경쟁 심했다. 일단 청부 맡으면 엄청나게 벌었다. 수수료를 뗀 나머지를 국고에 넣었다. 더 받아내고 다 받아내야 내 몫 커진다. 갑부 되는 지름길, 그러니 얼마나 쥐어짰겠는가. 원성이 자자했다.

용병대장은 전쟁상인이다. 전투기간과 병력과 비용에 관한 견적서를 제출한다. 군주나 대신과 가격을 협상한다. 낙착되면 출전한다. 그 전에는 전쟁에 귀족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귀족 눈치 살폈다. 용병 쓰면 그럴 필요 없다.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됐다.

공직을 군주가 팔고, 원하는 자가 사는 행위는 하나의 제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돈 많이 낸 사람에게만 파는 건 아니었다. 자리마다 공정가격이 있었다. 내게 충성할 사람에게만 팔았다. 내 심복집단 두텁게 만드는데 이용했다. 두세 배 낸다 해도 소용 없었다. 제 아무리 똑똑한들 본인이나 주변에 배신 전력자나 가능성 있으면 “너는 안 돼!”.

고등법원은 13세기의 궁정회의가 절대주의시대에 맞게 변신한 기관이다. 구 궁정회의 멤버는 토지 소유를 토대로 한 전통 구 장원 귀족이다. 고등법원 법관은 부르주와지 출신이다. 돈으로 법관자리를 매수한 신 법조귀족이었다. 이 새 귀족이 구 귀족을 견제했다. 초기에는 왕의 권력 확대에 기여했다.

루이 14세의 ‘나의 수도’ 파리 구상

결혼 23년 만에 태어난 옥동자. 루이 14세다. 늦둥이 놔두고 아버지 루이 13세가 작고하자 여섯 살에 즉위했다. 재상 마자랭이 죽은 스물세 살이 되어서야 기를 폈다. 나의 궁전 베르사유와 나의 수도 파리 건설작업에 착수했다. 파리가 왜 이리 어두운가. 게다가 거리가 더럽다. 전염병 잘 돈다. 불 잘 난다. 도둑도 많다. 폭동은 맨날 일어난다. 경제사정은 또 얼마나 열악한가. 파리의 ‘핸섬한 질서 handsome order’를 구현할 제도를 만들어라. 1666년이었다.

세계의 수도 파리를 만들려는 국왕의 뜻을 받들자. 재상을 중심으로 정권의 실력자가 모여 궁리했다. 제대로 된 경찰이 있어야 했다. 물론 당시에도 경찰기관은 있었다. 무력했다. 야경 권한이 고작이었다. 시장과 경찰담당 부시장은 치안에 의욕이 없었다.

파리 경찰청장 자리는 금화 15만냥

새로운 파리 경찰청장(the Lieutenant of Police)를 신설했다. 국왕 칙령이 포고됐다. 1666년 12월이다. 청장의 권한을 세세하게 기술했다. 출생과 사망과 주소이전의 신고. 여행허가와 여권의 발급. 치안과 소방. 홍수예방과 재해 대책. 보건위생과 노동 규제. 빵과 생필품의 공급과 가격 관리. 먹고 마시고 놀고 자는 시설의 인허가. 시장 개설과 도량형 검사. 건설과 토목과 도시계획. 언론출판 및 집회와 시위의 검열 및 허가. 일상생활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파리경찰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재무총감 콜베르. 새 직책 파리경찰청장 직무명세서(job description)를 왕에게 보고했다. 아울러 적임자도 상신했다. 니콜라 가브리엘 들 라 레니(Nicolas-Gabriel de La Reynie)다. 그는 자리 값으로 금화 15만리브르(livres)를 냈다.

초대 파리 경찰청장 발탁 배경

?대학에서 법학 전공. 변호사와 판사로 활동했다. 왕권 강화에 저항하는 프롱드당의 반란이 일어났다. 고등법원 판사를 비롯한 많은 법조인이 왕권 타도에 가담했다. 여기에 끼지 않았다. 5년 내내 왕에 대한 충성을 변함없이 간직했다. 내란이 끝났다. 충성심에 대한 보상조치가 취해졌다. 파리 행정고등법원 판사직을 살 자격이 주어졌다. 뭘 망설이냐, 즉각 매직했다. 그 돈 이상의 가치가 있는 법복을 입었다. 덕택에 재상도 알게 됐다. 재무총감과도 연이 닿았다.

1667년 파리경찰청 첫 청장이 됐다.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세계인의 수도 파리의 기초와 골격은 초대 청장의 작품이다. 최초로 가로등도 설치했다. 다른 나라 도시가 뒤따랐다. 1674년 경찰청장(Lieutenant-General Police)으로 직명이 바뀌었다. 그래도 1697년까지 30년을 재직했다.

여러분을 다 잡아 가겠다. Nicolas-Gabriel de La Reynie는 담대했다. 파리 중심부에 범죄자와 부랑자와 도망자와 매춘부의 집단거주지가 있었다. 그들만의 성역(the Court of Miracles)이었다. 경찰도 그곳에 가지 못하는 금지구역이었다. 1668년 소탕작업에 들어갔다. 파리 경찰과 군경찰을 동원하여 포위했다. 개미 한 마리 빠져 나가지 못하게 봉쇄했다. 칼과 쇠스랑과 도끼를 들고 대항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덤빌 태세였다.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집계조차 어려운 거대한 무리였다.

경찰이 오히려 겁에 질렸다. 총을 쏘려 했다. 청장은 발포중지를 명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경고했다.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기회는 주겠다. 여러분을 다 잡는 게 어렵지 않다. 모두 교도소에 수감하거나 갤리선에 태워 노 젓는 노역을 시키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여러분 중에는 불가피하게 이곳에서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불행한 사람이나 범죄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곳을 떠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출구 세 곳을 열어 놓겠다. 맨 마지막에 남은 12명은 체포하겠다. 6명은 즉각 참수한다. 6명은 갤리선에서 20년 동안 노 젓는 일 하게 만들겠다. 자, 지금부터다!”

단 20분 만에 텅 비었다. 병자나 불구자도 다 도망갔다. 건물과 시설을 불 태웠다. 돌아와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날 도망갔던 사람 중에서 많은 이가 경찰 정보원으로 전향했다. 정보원이 필요했다. 왕은 언제나 배신과 반역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전쟁과 폭동도 왕좌를 위협했다. 이런 위험요소를 미리 색출해서 척결해야 안전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내외 정보수집 시스템이 긴요했다. 도청장치나 인공위성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사람 스파이(humint)가 최선책이었다.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을 발굴해서 운용했다. 비리나 스캔들을 눈감아 주는 대신 밀정으로 썼다. 전과자를 지하세계 첩보원으로 썼다.

루이 15세가 11대 청장이었던 Sartines에게 물었다. 정보를 어떻게 얻는가? “파리 시내에서 셋이 모여 무슨 얘기 한다면 그 중 한 명은 제 첩자입니다!” 이건 약과다.

구소련 시대 나돈 얘기다. 모스크바 거리에서 세 사람이 대화중이다. KGB는 몇 명? 둘이다. 나머지는? 미치광이. 정신 나간 사람이다.

왕비 심기 거슬려 파면도

?이들 청장은 가문과 파벌로 이어진 구시대 귀족이 아니었다. 상공업으로 돈 번 신흥계급이었다. 연줄 만들 기회가 없었다.눈치 보지 않아도 되었다. 왕의 뜻만 살피면 충분했다. 소신껏 일했다. 반면 돈 주고 산 자리지만 일 처리 시원찮으면 바로 교체했다. 2년을 견디지 못한 경우도 여럿 있다. 8대 Feydeau de Marville는 눈치 없어서 단명했다. 국왕 루이 15세만에게만 보고했다. 실력자인 왕의 정부 마담 퐁파두르(Pompadour)의 심기를 건드렸다. 베갯밑공사 했다. “청장 자리 내놓게 해요.”

전임자이자 장인인 7대는 14년 몸담았다. 후임자인 9대도 10년 넘겼다. 심기 관리 했기 때문이다.

혁명전 122년간 청장 14명

1667년부터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122년. 이 기간 파리경찰청 청장으로 14명이 거쳐 갔다. 이 시기는 구체제(the Ancien Regime)에 포함된다. 앙시앙레짐은 루이 16세가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짐과 동시에 종언을 고한 구질서(the Old Order)다. 더불어 매관매직제도도 없앴다.

마지막 청장. 14대 티로 드 크로네(Thiroux de Crosne). 1785년 임명. 혁명 전이니까 자리는 돈 주고 샀다. 유능한 행정가였다. 궁핍한 사람들을 도우려고 그들을 고용해 일당을 지불하는 공공근로사업을 전개했다. 성품이 순한 좋은 사람이었다. 1789년 혁명이 나자 투옥. 5년 후 공포정치(the Reign of Terror)의 피비린내 새삼 풍겼다. 1794년 4월28일 기요틴에 목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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