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팔선생의 고금인생] 1920년대 도쿄엔 ‘강남좌파’ 득실

p-11920년대의 일본에선 공산주의자(Marxist)가 유행이었다.

호텔에 좌익 살롱 차려놓고

1926년 봄 도쿄 혼고(本鄕). 도쿄제국대학 캠퍼스 인근의 기쿠도미(菊富) 호텔은 연일 북적거렸다. 그곳 방 하나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인텔리가 모여들었다. 마르크스 살롱이었다. 인기작가도 거기 있었다. 히로츠 카츠오( 廣津和郞)와 나오끼 산주고(直木三十五)다. 서른다섯 동갑내기. 한창 잘 나가는 영화배우들도 얼굴 내밀었다.

도쿄여자대학 학생들은 아예 차 대접이며 청소며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자타공인 공산주의자가 들렸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도 있었다. 무슨 사상인지는 잘은 모른다. 그렇지만 인텔리겐치아 사이에 난리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나 레닌 이름 모르면 축에 끼지 못한다. 이렇게 그런저런 남녀가 그 호텔 그 방으로 쇄도했다.

여기서도 코뮤니즘, 저기서도 볼셰비즘(Bolshevism). 1920년대 중반 일본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였다. 당국의 감시야 어디 끈 늦추겠는가. 사회 불안요인이라 하여 더욱 바짝 죄어 나갔다. 그래도 시대의 패션으로 등극했다. 그 중심에 그 호텔 룸 주인 후쿠모토 카즈오 (福本和夫)가 있었다. 1894년생이니까 당년 서른두 살. 정부장학금으로 2년간 독일 유학을 갔다 왔다. 스물아홉과 서른의 한창 젊은 나이에 현지에서 공산주의를 직접 만났다.

후쿠모토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다녔다. 미노베 타츠키치(美濃部達吉)와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두 교수에게 배웠다. 이 두 학자와 게이오대학의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교수가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리더였다. 1920년 졸업. 시마네 현과 야마구치현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2년 독일 행.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자본론을 공부했다. 독일공산당에도 가입했다. 1924년 귀국. 12월부터 잡지 <Marxism>을 통하여 기고하기 시작했다. 국내파 마르쿠스주의 연구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교토제국대학 마르크스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 肇)도 그 하나였다.

Fukumotoism

살롱 주인이 된 때가 1926년. 독일에서 귀국 후 세해 째였다. 서른두 살. 인생 절정기였다. 각계 젊은 지식인을 매료시켰다. 후쿠모토가 여고 시절 은사였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1980년대 후반 일본총리)의 모친. 그녀는 연모의 정을 담아 특별한 술을 양조했다. 다케시타 양조장 특산 대중(大衆)을 헌상했다.

왜 열광하나, 독일 유학생이라? 그렇게 단순치 않다. 일본 최초로 공산당선언과 자본주의를 독일 현지에서 독일어 텍스트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독일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이론과 실무를 섭렵한 마르크스주의자! ‘福本ism’으로 정리했다. 인텔리가 전위가 되어 후위인 노동자와 농민을 지도한다 했다. 무료한 지식인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할 일 준 그에게 몰렸다.

공산주의자 산실 도쿄제국대학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은 충격이었다. 혁명이다, 혁명! 일본 지식인을 사로잡았다. 마르크스주의 세례를 받았다. 1918년 12월 도쿄제국대학에 신인회(新人會)가 결성됐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흠모하는 학생이 뭉쳤다. 마르크스주의를 경제학 연구 접근방법의 하나로 본 교수가 많았다. 도쿄제국대학 오우치 효에(大內兵衛) 재정학 교수가 중심인물이었다.

미노베 타츠키치 교수의 장남 료기치(美濃部亮吉)도 일원이었다. 료기치는 나중에 좌파 도쿄 도지사가 된다. 1928년 좌경교수가 일제히 추방됐다. 1937년 일본 공산당 비주류 중심의 인민전선이 발각됐다. 연루자 446명 중 교수가 38명이었다. 오우치와 료키치도 검거됐었다.

자본론 읽어야 지식인

여류작가 가네코 요분(金子洋文)는 “인텔리겐치아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고 동년배에게 물었다. 답도 제시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 도쿄 간다(神田) 서점가. 책방마다 마르크스주의 코너를 설치했다. 1928년에는 개조사(改造社)의 마르크스 전집이 나왔다. 1924년 프롤레타리아 문학지 문예전선(文藝戰線)이 창간됐다. 1928년 출범한 전일본 무산자예술연맹은 1931년 프롤레타리아 문화연맹으로 개칭했다. 기관지는 전기(戰旗). 훨씬 나중의 사건이지만 가부키(歌舞伎) 배우는 단체로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

“무산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사회 전복, 그리고 사회주의 도래한다.” 이 역사발전법칙이 젊은 지식층의 마음을 지배했다. 1920년대 중반 시대사상이었다.

일본공산당은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립, 1920년 5월 제1회 May Day 행사를 거쳐 1922년 7월 15일 창당했다. 현재 일본 국회 중의원 의원 8명과 참의원 의원 11명이 있다. 지방자치단체 단체장은 49명. 지방의원은 2689명이다. 체포-검거-투옥-해산-재건-전향-와해의 과정을 거쳤다. 1929년 이후 지하로 숨어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직후 1945년 10월 합법정당으로 재출범했다. 폭력혁명론에서 평화혁명론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그러나 엄연한 Marxist Party다. 당원은 약 32만명 . 이 중 당비 내는 당원은 25만명이다. 후원금 내는 후원회 회원도 380만명이나 된다. 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 구독자도 많다. 당 지도부를 비롯해 당원 중에는 도쿄대학 출신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노동자나 농민 출신 Marxist는 드물다. 사회와 역사의 희생자. 빈곤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배제된다. 소외된다. 대학 다니고 유학 갈 정도면 프롤레타리아는 아니다. 부르주아다. 혁명의 과실은 이들이 다 따먹는다. 권력의 주인공 된다. 배불리 먹는다. 냉난방 하며 산다. 참 아이러니다. 노동자 농민 위한 일꾼 자처하면서 호텔에 거처 정해 놓은 사람. 1920년대 중반 Maxist의 총아. 후쿠모토 카즈오는 어떻게 됐을까.

1926년 12월 4일 일본공산당 재건작업에 중앙위원으로 영입됐다. 1927년 코민테른에서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당신 이론은 스탈린 동지를 비판하고 있소!” 이 한마디로 실각->체포->투옥->복당->참의원 낙선->실의, 마침내 은거에 들어갔다. 그 아들은 정반대의 길 걸었다.

후쿠모토의 아들은 아버지의 모교 도쿄대학 후배다. 경제학부 졸업 후 기자가 됐다. 얼마 후 당시 관방장관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悅三郞)의 비서관으로 가게 됐다. 이를 안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보를 쳤다. 하필 수구 반동의 비서를 하는 게냐. 절대 반대다. 아들은 정계와 재계를 잇는 파이프 역할을 했다. 화랑 후지 아트를 경영했다. 그림을 이용해 정계와 재계의 이권을 중개했다. 아버지는 일본 공산주의 이론 Fukumotoism 창시자. 아들은 일본 최후의 재계 관방장관, 추악한 자본주의(ugly capitalism)의 배후 검은 손.

아버지가 불우한 나날 보낼 때 아들의 돈이 도움이 됐다. 덕택에 편안한 말년 보냈다. 그제나 이제나 금석지감, 좌파라면서 생활은 우익이다. 자산가 뺨친다. 자식들은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 유학 보낸다. 몇백만원짜리 월세 산다. 웬만한 사람 월급이다. 빈티 나면 표 몰아주지 않는 나라다.

1960년대 미국공산당 당수 구스 홀.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았다. 매년 신형 올즈모빌 샀다. 소련에서 4천만 달러도 챙기고. 베트남전쟁 반대 10만 워싱턴 행진의 날. 그는 낚시 중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나갔다. 당원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참가증명용이다. 그리고 다시 낚시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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