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행 교수님, 노동의 새벽은 언제나 찾아올까요?”···’열세살 여공’ 신순애 올림

김수행(金秀行, 1942년 10월 24일~2015년 7월 31일) 교수는 대한민국의?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한국 최초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완역했다. 한신대 무역학과 부교수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8년 서울대 정년 퇴임 후 성공회대에서 석좌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쳤다. 2015년 7월 3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김 교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자 신순애씨가 추모글을 보내왔다. 신씨는 13살부터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공장생활을 해오며 50대 들어 만학으로?김수행 교수의 대학원 제자가 돼 석사학위를 받았다.-편집자

[아시아엔=신순애 <열세살 여공의 삶> 저자] 나는 1966년 평화시장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하였다. 열세 살이었다. 이후 ‘청계노조’를 알게 되었고 노조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활동을 하였다. ‘청계노조’는 故 전태일 열사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분신자살한 이후 생긴 노조다.

나는 1997년 청소년 NGO인 ‘탁틴내일’에서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청소년 상담전화인 ‘1388’에서 위기의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좀더 공부를 해서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초등과정 검정고시부터 시작해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당시 내 나이 53살이었다.

내가 김수행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가을 학기때였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 중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노동자 출신인 나에게 특별히 배려해 주시고 사랑도 듬뿍 주셨다. 처음 수업시간에 들어오신 김수행 교수님은 흰머리가 많고, 피부는 백옥처럼 맑게 보였다. 교수님의 해맑은 인상과는 달리 수업만큼은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셨다. 교재인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아주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다. 특히 ‘노동가치론’을 설명할 때는 매우 진지했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렸고 중간시험 기간이 되었다. 교수님께서는 시험과제를 3가지 주시고 선택해서 하라고 했다. 그 3가지는 그동안에 배운 것 중에 한 꼭지를 택해서 리포트를 쓰든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의 소신, 혹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독후감 대신 문제점 등을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고 리포트를 준비했다. 리포트에서 나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산업사회 초기에는 섬유부터 시작해서 나이 어린 소녀 소년들의 노동력으로 초기 자본을 만들었다”고 썼다. 특히 내가 13살부터 시작한 시다 미싱사 생활를 구체적으로 쓰면서 “힘없는 여성이 노조를 통해서 당당한 노동자로 성장했는데 <전태일 평전>에는 불쌍한 여공으로만 묘사되어 있어서 아쉽다”고 썼다.

교수님께서는 내 리포트를 읽어보시고 나에게 “신순애 선생, 잘 읽었어요. 그런데 내년에 성공회대 NGO정치경제학과가 신설되는데 이곳에 입학해서 신 선생의 생애를 논문으로 쓰면 좋겠다”고 권유하셨다. 교수님은 “유럽에는 생애사 논문이 많이 있는데, 한국에는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교수님은 특히 1960~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 아주 높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내 생애사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평소에 지인들이 내게 책을 내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자신이 없던 차였다. 김수행 교수님의 권유를 받아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김수행 교수님과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으로 정치경제학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만나는 자리에 4.5리터짜리 포도주 3통을 들고오시는 김 교수님을 보면서 학생들과 나는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도 함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생이 되었는데 NGO대학원생들에게는 사물함이 없었다. 나는 학생처에 가서 사물함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민원을 제기했더니 담당자는 밑에서부터 보고가 올라와야 한다면서 담당교수님께 말씀을 먼저 말씀드리라고 했다. 나는 김수행 교수님께 사정이야기를 하니 교수님께서는 “말도 안 된다”면서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신 선생은 내 연구실을 쓰세요”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교수님 연구실에서 공부할 수 있는 특혜도 받았다. 나는 교수님 연구실에서 공부하면서 다른 학우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출판사와 매달 발표회를 하셨는데 그때마다 새로 발간한 책을 내게 주셨다.

나는 연구실 청소를 했다. 교수님께서 어떻게 알았는지 “신 선생 청소 같은 것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하세요”라고 하셨다. 교수님께서 연구실에 오시면 “교수님, 커피 한잔 타드릴까요” 하면 교수님께서는 “학생은 내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며 손수 컵을 들고 나가시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교수님께는 권위주의가 전혀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존경하게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교수님께서 내 옆에 계시니 나는 대학생활이 더욱 즐겁고 행복했다. 내가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2년6개월간 있는 동안 교수님은 단 한번도 내게 심부름을 시키시지 않았다. 교수님께서는 오히려 식사 때면 “신 선생 밥 먹으로 갑시다” 하면서 “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내야지” 하면서 사주셨다.

어느 날 교수님께는 “시간이 흘렀으니 생각날 때마다 한 꼭지씩 써서 나에게 가지고 오면 내가 교정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책을 써보라”고 용기를 주셨다. 나는 메모식으로 기록했다가 방학 동안에 써서 학기 중에 교수님께 보여드렸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A4용지에는 검정글씨보다 빨강 연필의 교정이 더 많았다. 교수님은 “논문은 아이디어는 학생이 내고 교수가 쓰는 거”라며 “나도 영국에서 그렇게 공부했다”고 하셨다. 그런 식으로 교수님은 나를 정말 편안하게 해주셨다. 그렇게 나의 생애사의 글들은 네 번의 방학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모아졌다.

내 책상은 교수님 연구실 입구에 있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는 지나시며 “신 선생, 뭐가 제일 힘들어요” 라고 물으셨다. 나는 “영어요”라고 얼른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영어 신경 쓸 거 없어요. 내가 번역해줄 게요” 하면서 영어 발제문을 가지고 가셔서 번역도 손수 해주셨다. 교수님께서는 부모님처럼 내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알아서 챙겨주시기도 하셨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 더 보고 싶고 더 그립기만 하다.

그렇게 해서 내 논문 <열세 살 여공의 삶>은 완성되었다. 게다가 우수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3년 <열세 살 여공의 삶> 단행본이 나와 출판기념식을 하는 날이었다. 교수님께는 축사를 하시면서 1970년대 함께 노동운동했던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이곳에 계신 분 중에 대학에 가고 싶다면 성공회대로 오세요.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하셨다. 그 한마디에 함께 있던 동지들은 “순애 진짜 복받았다” 하면서 부러워했다.

정말 멋지신 김수행 교수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만학 제자 신순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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