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호찌민, 불변(不變) 속에 만변(萬變)을 품다
하노이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북베트남 국경 지역, 험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기슭을 끼고 돌면 폭포 옆으로 작은 오두막들이 숨어있다. 대나무 말뚝을 깊이 박고 그 위에 얹은 사방 4m 조금 안 되는 넓이의 엇비슷한 오두막 대여섯 채. 탄 차오(새로운 물결)라 불리는 이곳에 베트민(Viet Minh, 베트남 독립동맹) 지도부가 들어와 있다.
지압(Vo Nguyen Giap)은 군사회의 보고를 위해 주석의 막사로 들어갔다. 호 주석은 잠 잘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눕는 일이 없다. 그런 그가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이마에 손을 대니 펄펄 끓었다. 고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 옆 숙소에는 반일(反日)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미국 전략사무국(OSS) 요원들이 묵고 있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그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진찰을 마친 위생병은 주석이 말라리아와 이질을 한꺼번에 앓고 있다고 했다. 중국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미 결핵에 감염되었고 석방 이후에도 퍼붓는 비, 뜨거운 태양 속에서 각 지역으로 도보 행군을 하느라 다시 말라리아에 걸렸지만, 지난 4월(1945년) 까오방 성(省)으로 돌아 온 이후에도 호 주석은 일을 계속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이 임박했어.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네.”
키니네와 설파제를 투여하고 저녁이 되자 증세는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지압이 밤에 함께 있겠다고 하자, 호찌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54세, 시골 노인처럼 유순하게 보이지만 빛나는 눈은 여전했다. 5년 전 버마와 베트남 국경지역 쿤밍(昆明)에서 그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맑은 눈빛 그대로였다.
밤이 찾아왔다. 밀림 특유의 칠흑 같은 밤이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호찌민은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마치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젊었을 때 마르크스주의는 물론이고 불교, 유교, 기독교까지 공부했지. 나는 마르크스를 선택했지만, 어떤 교리든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교리를 가질 권리가 있어.”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이야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1년을 지냈어. 아시아노동자대학에서 마르크스가 전개한 이론을 레닌이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연구했지. 그 핵심은 ‘지도자는 올바른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지도자는 올바른 시기를 선택해야 한다. 지도자는 올바른 태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야. 혁명군의 지도자라면 어떻게 하지?”
“…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바라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고,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지압이 삼불(三不)전략을 말했다. “전투의 핵심은 사람이야. 사람을 깊이 이해하면 실현 가능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할 수 있어.” 사람에게는 네 가지 중요한 덕목이 있다고도 했다. “근면과 검소, 성실 그리고 정의야. 공자는 이를 한 마디로 ‘서(恕)’라고 했지. 사람의 가슴에 감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동지들의 신뢰를 얻고 적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네.” 꿈에 홀린 듯 대화가 이어졌다.
4년 전 호찌민은 혁명 본부를 위해 팍보(Pac Bo)의 밀림 속에 동굴 하나를 마련해 놓았었다. 베트민이 탄생한 바로 그 동굴이다.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 겨울밤. 동지들이 화로 주위에 둘러 앉아 무장투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지압의 암호명을 불렀다. “반(Van)아, 혁명이란 무엇이냐?” 지압이 주춤하는데 호 아저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공위상(以公爲上)이다.” 혁명을 하려면 이기심을 버리고 우리를 섬겨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압은 그날 밤의 기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정신이 맑아졌다가 희미해지는 증세는 밤새 되풀이 되고 호 아저씨는 끈질기게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지압은 문득 유언을 남기려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자마자 중앙위원회에 다시 상태를 알렸고 지역 주민들이 모두 나서 열병 치료에 유명한 사람을 수소문 했다. 급히 불려온 타이족 출신 노인이 맥을 짚었다. 그는 숲에서 캐온 뿌리를 태워 죽사발에 재를 뿌린 다음 호찌민에게 먹였다.
한 달 후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설립하고, 9월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불변의 자세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하라(以不變 應萬變).” 1946년 영미(英美)의 지원을 업고 재점령을 노리는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날 때 후인 툭 캉 주석대행에게 한 말이었다. 어설픈 원칙주의가 아니라 만변을 포함하는 불변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호찌민은 역설의 인물이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자인가. ‘절반은 레닌, 절반은 간디’라는 평가처럼, 호찌민은 두 가지 모두였다. ‘자유와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했다지만, 그에게는 자유(독립)와 함께 평등이 또 하나의 불변가치였다. 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자가 되었다면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그에게 자유(민족독립)와 평등(사회주의)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그런데 그의 역정을 되새겨 보면 자유와 평등에 하나 더 추가할 가치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박애 정신이다. 호찌민은 지도자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몸에 밴 청렴과 헌신이라는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인간적 매력은 혁명 동지들뿐 아니라 민족 전체에 하나의 영감이 되어 통일 베트남의 기초가 되었다. 식민지 베트남에서 프랑스혁명 정신을 버렸던 프랑스. 하지만 프랑스와 싸우면서 호찌민은 자유와 평등을 넘어 박애까지 온 몸으로 살아냈다. 그렇기에 베트남전쟁의 상대인 미국의 독립정신을 살려 베트남 독립선언을 만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인간내면을 무시한 획일적 평등주의가 무너지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드는 과도한 자유주의도 한계를 드러내는 오늘, 과연 호찌민의 ‘불변만변’ 철학은 베트남에만 필요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