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마중물 작가 박현찬은 ‘작가의 책상’ 역자후기를 이렇게 썼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중고책방에 들러 퀘퀘한 종이냄새에 파묻히다 보면 때아닌 횡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 전 읽었다 내곁을 떠난 책을 발견하기도 하고, ‘이런 책 없을까?’ 하고 상상해온 책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봄 내가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 번역되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도 중고책방 덕택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얘기하면 중고책방을 들러 그 책을 찾아낸 역자의 안목 덕분이다.

<작가의 책상>(위즈덤하우스)이 세상에 나온 이력을 읽고서 나는 고교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서 읽은 <언관사관>과 저자 천관우 선생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런 엉뚱한 질문을 내게 던져봤다. “<작가의 책상> 저자 질 크레멘츠가 천관우 선생을 알았다면 그의 책상도 분명히 이 책에 넣지 않았을까?”

<작가의 책상>은 모범생의 잘 정돈된 책상처럼 독자위주로 써졌다. 더욱이 그동안 <경청> <마중물> 등 창작에 몰두해온 ‘성실한’ 작가 박현찬의 번역이어서 더욱 맘에 든다. 역자 후기를 그대로 옮겨 <아시아엔>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 한다.

그러니까 아마존(Amazon) 중고서적 코너에서 10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물론 국제 우송비를 포함하면 웬만한 책 한권 값보다 비싸지만, 나름 운 좋게 원서를 구입했을 때는 결국 내가 이 책을 번역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좋아하는 애서가로서 ‘책에 관한 책’들에 조금 더 관심이 끌리는 나에게 <작가의 책상>(Writer’s Desk)이란 제목은 단번에 눈길을 확 잡아끄는 ‘물건’이었다. 작가와 책상이라…, 작가가 무릇 글을 쓰는 인간이라면 그 글이 탄생하는 공간이 바로 책상인데, 그렇다면 작가에게 책상이라는 존재는 일상에 필요한 가구나 집기라는 차원을 넘어 뭔가 의미심장한 소통이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대상이 된다. 작가들에게, 책상이 놓인 공간은 성직자의 기도실만큼 성스럽고 연금술사의 연구실만큼 비밀스러우며 요리사의 주방만큼이나 열기가 뜨거운 공간이 아닐까.(존 업다이크(John Updike)는 서문에서 거리 여인이 정사를 벌이는 침대를 연상했다.) 이런 식의 상념이 꼬리를 무는데다, 무엇보다도 책이 절판된 상태라는 점이 구매 욕구를 더 강하게 자극했다.

이 책의 저자 질 크레멘츠(Jill Krementz)는 수십 년 간 유명 작가들의 사진을 찍어 온 사진작가로, 작가들의 사진을 묶어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대부분이 이미 수년 전에 절판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소수의 중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만 유통이 되는 형편이었다. 한국의 저작권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갔을 때 저자가 상당히 놀랐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인지 번역에 대한 승낙은 무척이나 신속했다고 한다. 책에도 제각각 운명이 있다더니 이 책이야말로 자기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영문판으로 태어나서 스무 해 남짓 제 일생을 다하는 줄만 알았던 이 책이 무슨 인연인지 멀리 아시아 지역에서 한글판이라는 새로운 몸을 얻어 다시 생명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노출이 당연시되지만 거슬러 올라가자면 거의 사오십 년 전 그 시절에, 작가의 사적인 공간에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 작가에게는 물론이고 사진가의 입장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인물 사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책상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작가가 책상에서 하는 일이란 게 결국 글쓰기와 창작일 텐데, 그 내밀한 속사정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스스로 털어놓아야 하는 조건이라면, 과연 이런 종류의 출간작업이 가능하기나 할까. 아무튼 신기하게도 그 내로라하는 유명 작가들 50 여명은 인상적인 포즈와 함께 글쓰기의 비밀마저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일부가 실린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지의 연재 의뢰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아무래도 남편인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을 포함해 여러 작가들과 수 십 년간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어온 저자의 개인적 역량이 책 출간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듯싶다.(이렇게 드문 사례를 하나 더 알고 있는데, 기회가 닿으면 그 책을 ‘자매편’으로 번역 출간하고 싶다.)

책에는 1970년대 초부터 90년대 후반까지 책상의 풍경이 기록되어있다. 구식의 올리베티 수동타자기에서부터 전동타자기, 워드프로세서, 초기의 탁상 컴퓨터를 거쳐 랩톱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구술전용 녹음기까지 다채로운 장비들이 선을 보인다. 그 자체로 글쓰기의 흥미로운 변천사를 보여준다. 물론 영원한 비밀병기인 연필과 펜에 대한 작가들의 애정 고백도 빼놓을 수는 없다. 에이미 탄, 에드위지 당티카, 윌리 모리스, 피터 마티센, 캐서린 샤인, 리처드 포드, 조지 플림턴 등 열 명의 작가는 이 책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원고를 써주었고, 다른 작가들도 미발표된 원고를 챙겨주거나 혹은 기왕에 자신이 글쓰기 경험에 대해 발표한 글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책의 본문에 말줄임표가 자주 보이는데, 그건 제한된 텍스트 공간에 글쓰기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수록하기 위해 이 책의 저자가 심사숙고한 흔적이기도 하다.

어찌하다보니 글쓰기와 책쓰기를 강의하는 자리의 말석을 십여 년 동안이나 유지하고 있는데, 좋은 글을 쓰고 훌륭한 책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갈수록 오리무중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점점 뚜렷해지는 것은 ‘글을 쓸 때의 기분이나 글을 쓰고자 하는 감성적 욕구가 작문 시간에 배우는 인지적인 기술보다 본질적으로 더욱 중요하다’는 앨리스 플래허티(Alice W. Flaherty)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는 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스티븐 킹 나아가 지극히 평범한 지망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창의적 열정과 글쓰기의 문제를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의 관점에서 연구하여 얻어진 플래허티의 통찰은, 역설적으로 이 책에서 작가들이 알려주는 자신만의 내밀한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이를테면 토니 모리슨은 매일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는 그 순간이야말로 자신이 작가로 변화 되는 순간이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헤밍웨이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스무 자루의 연필을 깎는다고 하고 리타 도브는 순수한 고요함을 찾아 오두막집으로 향한다. 또한 제임스 미치너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다도를 공양하는 선사처럼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한다. 글쓰기에서 문장의 구성이나 문체의 개성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과 에너지를 스스로 채우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난망할 따름이다.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고 새 생명을 불어넣어준 박선영님과 가정실 편집장에게 책을 대신해서 감사를 드린다. 부디 많은 독자들이 이 책과 함께 글쓰기의 신비한 체험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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