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마하트마 간디, 인간을 향한 위대한 꿈
1948년 1월, 인도 서부 데칸고원의 도시 푸네(Pune). 좁고 허름한 신문사 사무실. ‘인도 정부, 간디(Mahatma Gandhi)의 단식 요구에 굴복, 파키스탄과의 협정 이행하기로’ 기사를 읽던 남자의 인상이 구겨졌다. 우익신문 <힌두 라슈트라>의 편집인 나투람 고드세는 동료 압테와 함께 뭄바이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힌두 마하사바당(黨)’의 지도자 사바르카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두 사람은 창 쪽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영토 분할을 받아들이더니, 이제는 파키스탄을 돕는다고? 국민회의는 영국 놈들이나 이슬람과 다를 바 없어.” 전투적 힌두주의를 신봉하는 그들에게 작년에 벌어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 독립은 더할 수 없는 모욕이자 배신이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객실 문이 열리며 눈이 번쩍 떠질 만큼 젊고 매력적인 여인이 다가왔다. 압테가 선뜻 일어섰다.
“혹시 창가 자리를 찾으세요?” 알고 보니 그녀는 유명한 영화배우 빔바였고, 행선지도 두 사람과 비슷했다.
“오빠가 역으로 차를 가지고 나오기로 했으니 두 분을 태워 드릴게요.” 주도면밀한 성격의 브라만출신 고드세는 내심 꺼려졌다. ‘시바지 파크라면 사바르카르의 저택 바로 근처가 아닌가.’ 하지만 여배우와의 다정한 대화에 들떠 자리까지 양보한 압테는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월30일, 뉴델리(New Delhi) 기업가 비를라(Birla)의 저택. 열흘 전에도 자신을 노리는 폭탄테러가 있었지만 간디는 평소처럼 오전 3시30분에 일어나서 아침기도를 마치고, 전날 밤 늦게까지 마무리하던 국민회의의 새로운 규약을 펼쳤다. 인도 전체를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뜨린 힌두-이슬람 분열의 문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최근의 간디는 국민회의 내부 상황 때문에 더욱 괴로운 심정이 되었다. 그토록 소망하던 독립이 이루어졌건만, 약탈과 강간, 살인 등 끔직한 폭력이 자행되고 사람들은 여전히 이기적인 욕심과 자기중심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난 50여 년 동안 민중에게 ‘아힘사(ahimsa-非暴力)’를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그로 인해 인도가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돌이켜보니 제자이자 동지인 네루(Jawaharlal Nehru)조차도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비폭력에 대해 그토록 큰 정열을 가졌으면서도 도대체 왜 폭력과 강제에 의존하는 정치나 사회제도를 지지하시는 겁니까?”
사실 간디는 현존하는 질서를 그대로 지지했던 적이 없다. 네루가 비폭력을 하나의 정책으로 받아들이는데 반해서, 간디는 비폭력의 선한 힘이야말로 사람들을 이상사회로 인도하는 참된 원칙으로 여겨 ‘사티아그라하(satyagraha-眞理把持)’를 실천했을 뿐이다. 사티아그라하는 폭력과 증오를 악으로 여겨 배제하며 상대를 해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다만 올바른 정신과 성실한 마음으로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상대방의 양심을 찔러 상대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간디는 열여섯 살 때 형의 순금 팔찌에서 몰래 금 조각을 훔쳐냈다가 자책하며 아버지께 자백서를 바친 적이 있다. 직접 말로 고백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의 매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아버지가 감당할 실망과 고통이 두려워서였다. 거동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침대에서 그것을 읽었다. 잠시 후 아버지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종이를 적셨다. 아버지는 말없이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간디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날 아버지의 사랑이 나의 양심을 정화시켰고 나의 죄를 씻어주었다. 당시에 나는 이것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순수한 아힘사였음을 알고 있다.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그 힘을 안다.’ 간디는 사람의 선한 양심을 믿었다. 비록 악한 행위를 하는 자라도 그의 존재 속에는 선한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에 대한 위대한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간의 선한 마음과 의지를 찾아내어 그 존재를 변화시키는 일 그것이 바로 사회개혁이며 인간혁명이었으며 종교였다. 변호사 시절 소송사건에서도, 현실의 정치투쟁에서도 간디는 같은 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간디는 요즈음 비를라 하우스에 경찰의 경비가 강화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몸을 수색하는 것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진리를 간구하며 죽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30일 금요일 오후 4시30분. 나투람 고드세는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압테도 잠시 후 뒤를 따랐다. 비를라 하우스에 도착하자 출입구 주변에는 경찰관들이 쫙 깔려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택 안에는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시가 조금 지나자 사람들이 웅성이더니 모두 일어서 비켜섰다. 간디가 목재 단상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간디가 보였다. 그는 조카딸 마누와 아바의 어깨에 손을 얹고 천천히 다가왔다. 웃음을 지으며 합장을 하고 사람들의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고드세는 침착하게 재킷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베레타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순식간에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는 마누를 거칠게 밀어젖히고 간디와 마주섰다. 연달아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간디는 비틀거렸다. 두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헤 람!(오 신이여!)” 위대한 영혼(Mahatma)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몇 주 후, 암살범을 만났던 여배우는 기차에서 만난 젊은 남자 둘을 어디에 내려주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법정에서 그녀의 증언은 사바르카르의 배후 조종 혐의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하지만 고드세와 압테만이 교수형에 처해졌을 뿐 사바르카르는 무혐의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