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나쓰메 소세키, 이런 꿈을 꾸었다

일본 소설가이자 평론가 나쓰메 소세키. 메이지 시대 대문호 중 하나로 그의 사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진=위키미디어>

언젠가 이런 꿈을 꾸었다. 분명치는 않지만 큰 배를 타고 있었다. 아마 2년 전(1900년) 요코하마(橫浜)를 떠날 때 탔던 독일의 기선 프로이센호와 같은 배였는지도 모른다. 배는 밤낮 없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파도를 가르고 나아갔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배는 서쪽으로 갑니까?”

선원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왜요?” 하고 되물었다.

“떨어져가는 해를 쫓아가는 꼴이라서 말이죠.”

나는 우리 배를 앞질러 가던 태양을 가리켰다. 손이 가리킨 저 멀리에는 빨갛게 단 부젓가락이 지지직거리듯 태양이 파도 밑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파란 물결이 검붉은 빛으로 들끓었다. 선원은 껄껄 웃더니 획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장단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쪽으로 가는 해의 종착지는 동쪽일까. 그게 사실일까.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의 고향은 서쪽일까. 그건 사실일까.’ 소리를 따라 뱃머리에 가보니 서양인 선원들이 모여서 돛 줄을 조종하느라 분주하다. 배는 여전히 굉장한 고함을 내지르며 태양을 열심히 쫓아간다. 하지만 결코 따라잡지는 못한다. 언제 육지에 닿을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파도는 굉장히 크고 거칠었다. 바다는 온통 짙은 파란색, 때때로 보라색으로 바뀐다.

나는 몹시 외로워졌다. 왠지 기분이 우울해서 손에 들고 있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위로 배에 머물고 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기야 영국인 집주인은 나를 보고 신경쇠약에 걸렸다 했고, 도이 반스이(土井晩翠)라는 작자는 내가 광기에 빠져있다고 본국에 글을 보내기까지 했다. 아무렴 현명한 사람들이 한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매일같이 어두운 하숙방에 틀어박혀서 파리머리만한 작은 글씨로 5, 6인치 높이에 달하는 노트를 남길 만큼 맹렬히 공부를 해보았을까. 영문학을 공부해보겠노라 관명(官命)을 받아 바다를 건너와서 문학서가 싫어진 심정을 알기나 할까. 문학서를 읽고 문학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겠다는 생각은 피로 피를 씻는 것과 같다. 마치 자루 속에 집어넣어져 나올 수 없게 된 형편이랄까.

나는 일체의 문학서를 고리짝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 자루를 뚫을 송곳을 찾아 런던을 헤매었다. 영국학자들의 연구서적을 모조리 찾아서 읽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마침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인지 그 의미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완전히 타인본위(他人本位)로 사고하고 행동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야 뿌리 없는 부평초가 물 위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어디선가 불쑥 솟아나 내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 호통은 망연자실해 있던 나에게 여기에 서서 이 길로 이렇게 저렇게 가야 한다고 깨우쳐주는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호통소리를 손에 쥐고 나서 아주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다년 간 고뇌한 끝에 드디어 내 부리로 딱 소리를 내며 광맥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문학에서만큼은 내가 일본인임에 입각해 자기본위(自己本位)를 지키겠노라고. 잠깐 동안이지만 나는 매우 경쾌한 마음으로 음울한 런던 거리를 바라보았다.

나쓰메 소세키가 살던 집. 그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를 집필해 등단했다.

귀국하면 좋은 자리를 얻어 도쿄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규슈의 구마모토(態本)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갑판 위로 나가 혼자서 별을 바라보는데 외국인 하나가 다가와 천문학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묵묵히 있었다. 지루해진 나머지 살롱을 기웃거리는데 화사한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다. 그 옆에는 큰 키의 근사한 남자가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승객들은 모두 피부가 희고 복장도 훌륭하다. 보잘것없는 하녀 중에도 미인들이 꽤 보였다. 일본인은 정말 노랗게 느껴진다. 게다가 나 같은 곰보 얼굴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어느 순간, 모든 것에 재미가 없어졌다. 마침내 나는 죽기로 결심을 했다.

며칠 후 밤이 되기를 기다려,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나는 바다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다리가 갑판을 떠나 배와의 인연이 끝나려는 순간, 갑자기 나의 목숨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이런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나는 이제 좋든 싫든 바다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배의 높이가 매우 높았었는지 몸을 던졌지만 발은 쉽게 물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붙잡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내 몸은 점점 물 가까이로 떨어져 갈 뿐이다. 아무리 발을 오므리고 몸을 구부려도 물에 다가설 뿐이다. 물빛은 검고 검었다. 배는 무심하게 검은 연기만을 토해내며 그대로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배일 망정 역시 타고 있는 편이 좋았다고 비로소 깨달으며, 그 깨달음을 이용해보지도 못한 채 무한한 후회와 공포를 품고 검은 파도 쪽으로 조용히 떨어져 갔다….

그로부터 100년 후, 지난 1000년간의 일본문학가에 대한 독자 인기도가 발표되었다. 1위를 차지한 인물은 일본 근대의 최고의 문호로 추앙되는 나쓰메 소세키. 그는 언젠가 이런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夢十夜>(1908년)를 바탕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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