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쿠빌라이 칸, 유목과 정착을 넘어

몽골 카라코룸을 흐르는 오르콘(Orchon)강. 원 황제의 여름 피서지인 상도(上都)는 몽골제국 헌종 6년(1256년) 때 쿠빌라이에 의해 건축이 시작됐으며 원 순제 때인 1358년 홍건적에게 파괴됐다. <사진=위키피디아 He-ha-mue>

병서(兵書)를 베고 잠을 자던 쿠빌라이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인 성곽 안에는 시내가 흐르고 샘이 솟으며 항상 푸른 목초가 가꿔져 있다. 평소 같으면 말 엉덩이에 표범을 묶어 달리다가 사슴이나 노루, 영양 등을 공격하게 하여 매에게 먹이로 던져주며 기분을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즈음 쿠빌라이는 심사가 편치 않다. 대리석과 각양의 석재로 지어진 웅장한 황궁 대안각(大安閣)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망루에 오르니 개평(開平-上都)의 외곽을 길게 두른 성벽 넘어, 백성들의 흙집 군락과 내몽골 초원의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뭉케 형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후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격렬한 내전. 쿠빌라이는 2년 전 마흔 다섯이 되던 해(1260년) 봄, 자신이 건설한 이 도시에서 쿠릴타이회의를 소집해 대칸에 즉위했다. 하지만 천하에는 아직 두 명의 대칸이 존재한다. 동생 아릭 부케가 전통 유목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대칸에 올라 카라코룸에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없었다. 두 명의 대칸이라니…. 게다가 최근에는 남쪽 지방에서 믿었던 신하의 반란까지 있었다. 살집 좋은 강인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그어졌다. 쿠빌라이에게는 제국의 경영에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부르셨습니까?” 젊은 유학자 허형(許衡)이 멀리서 읍을 하고 허리를 숙였다. 정원 중앙에 따로 지어진 대나무궁전의 접견실. 내부는 온통 금박으로 덮여있고 기둥과 벽에는 나무와 꽃, 동물과 새들의 문양이 정교하게 장식돼 있다.

“그대는 왕문통(王文統)의 과오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말하지 않았는가?” 허형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다만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지난 2월 산동지역 군벌인 이단(李壇)이 남송(南宋)군과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와의 투쟁에 몰두해 있었음에도 즉각적으로 대응에 나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결국 이단은 제남(濟南)으로 쫓겨 애첩을 안고 대명호(大名湖)에 몸을 던졌으나, 몽골군은 물에서 건져 부대자루에 넣어 말들이 짓밟게 했다. 재상 왕문통은 그런 이단의 장인으로 반역사건에 연루돼 사형 당했다.

“과오를 알면서 어찌 고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모두 대칸의 신하이온데 관료와 학자 사이의 다툼으로 불충을 범할까 저어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는 왕문통이 자신을 음해하려는 것을 깨닫고 잠시 관직을 물러났었다.

“그렇게 행동한 것은 공자의 가르침 때문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지 않겠는가?” 허형은 조정에 참여한 다른 학자와 달리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일보다 실용적인 업무를 중시하며 현실적이고 유용한 기여를 하려고 노력했다.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라.” 허형은 머리를 숙였다. 그는 진정으로 쿠빌라이에게 매료돼 있었고, 쿠빌라이 역시 그런 그를 총애했다.

“육기(陸機)라는 자가 ‘말을 타고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하지만 통치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세상의 만물은 음양의 이치를 따라 생성하고 변화하옵니다.” 허형은 조심스럽게 생각의 실마리를 놓았다.

원나라 때 건축된 거용관 부속건축물 ‘운대(雲臺)’. 원 황제는 3월에 대도를 떠나 상도로 갔다가 9월에 상도를 떠나 대도로 돌아오는 양경순행제를 시행했는데, 순행로는 대개 이 거용관을 거쳤다.

“그대 말은 정복이 양이라면 통치는 음이라는 뜻인가?” 젊은 시절 어둠 속에서 숨어 지내던 쿠빌라이는 중국정복 원정에서 성공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근거지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몽골의 전통주의자들은 쿠빌라이가 유연한 통치력을 발휘해 명망을 얻어갈수록 그의 친중화적 태도가 자신들의 유목경제를 전복시킬까 두려워했다. 이방인의 지배를 혐오하는 중국 본토인들은 쿠빌라이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정책을 취하든 한쪽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몽골의 유목과 중국의 농경, 양쪽의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기는 어려웠다. 쿠빌라이가 직면한 이중의 딜레마였다.

“또한 전통 몽골 유목이 양이라면 중화의 정착은 음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정복하면서 통치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유목을 하며 정착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만물은 음과 양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차이와 한쪽만 보는 것은 야만일 뿐입니다. 사이를 넘어 차이와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 문명의 길입니다.”

쿠빌라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두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주둔하던 몽골 제왕들에게 대칸의 독점적 권한이던 정착지대 관할권을 대폭 위임해주었다. 그것은 단위국가 울루스 모두에게 유목민과 농경민을 동시에 장악하고 지배하는 권리를 주어 연맹행태로 제국적 연대감과 일체성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상도 이외에 연경(燕京-大都)을 추가하여 복수의 수도를 가지는 양경제를 운영했다. 양경순행제(兩京巡行制)는 단순히 두 개의 도읍이 아니라, 지름이 350km나 되는 타원 영역 안에 다양한 기능 도시를 포함하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였다. 양경제는 동영지, 하영지로 계절 이동하는 유목민의 전통 양식의 연장이기도 해서 울루스 연맹제와 더불어 유목과 정착, 정복과 통치를 동시에 해결하는 비책이 되었다.

혹자는 인류의 문명을 초원유목과 농경정착의 두 가지 유형으로 거칠게 대별한다. 근대의 시각으로 서양의 유목문명과 동양의 정착문명을 구분하기도 한다. 13세기 쿠빌라이는 두 문명의 충돌을 온 몸으로 감내하며, 동쪽의 태평양부터 서쪽의 지중해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단일 정치질서 속에 포섭했다. 안정된 통치를 유지하고 육로와 해상에서 모두 동서문명 교류를 이끌어냄으로써 ‘팍스 몽골리카’를 이루었다. 쿠빌라이 이전에는 그 누구도 지구적 규모에서 유목과 정착을 넘나드는 하나의 세계를 꿈꾸지 못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그의 조부 칭기스 칸마저도 유목문명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유라시아를 실질적으로 통일한 쿠빌라이와 그의 시대. 차이와 대립을 넘어서려는 위대한 꿈과 비전은 인류의 역사유산으로 남아 지구 전체를 하나로 묶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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