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50회(최종회) “세 가지 사이(間)”
리조트에 도착하자 총지배인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변형섭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주변에는 리엔을 비롯한 현지인 팀장들과 몇몇 간부들의 얼굴도 보였다.
“무슨 일이지? 총지배인님은 어디 계셔?”
형섭이 집무실 쪽을 가리켰다.
건물로 들어서자 복도 안쪽에서 안젤라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기준을 맞았다.
“안젤라, 총지배인님은 괜찮으신 거야?”
어딘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는 기준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사흘 전에 리엔하고 직원들 여러 명이 병원에 다녀갔어요.”
“왜? 총지배인님 만나러? 무슨 일로?”
“팀장급 이상 부서장들끼리 결의한 모양이에요. 자진해서 연봉을 삭감하기로. 대신 지금 리조트 식구들 모두 함께 일하게 해달라고…….”
기준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이 링크빌리지로 옮겨간 이후 리조트에서는 현지인 인력을 구조 조정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준으로서는 당장 자신에게 닥친 일에 온 신경을 쏟다보니 리조트 식구들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총지배인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어?”
“그 날은 잘 알겠다고만 하셨어요.”
안젤라는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기준의 채근하는 시선을 받자 몇 마디를 덧붙였다.
“며칠 밤새 잠을 못 이루시는 것 같더니 뭔가 결심이 서신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뭔지, 섣불리 여쭤보기도 어려워서…….”
안젤라의 조심스러운 설명을 들으며 기준은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변형섭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김 형의 본사 발령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실까?”
기준이 즉답 대신 말을 돌렸다. “변 형, 지금 방에 두 분만 계신거야?”
“아니, 서울 본사에서 기획실 이사님도 오셨어.”
“그래?” 기획실 이사가 참석했다? 그렇다면, 지금 집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협의는 리조트 내부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 것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총지배인님이 바둑판에 놓은 돌은 어떤 수일까. “본사 임원이 포함된 3자 회동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궁금해 하고 있어.”
형섭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두 시간째야.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나누시는 건지. 갑자기 본사 기획 이사님은 왜 오신 건지.”
기준이나 형섭 뿐만 아니라 리조트의 전 직원들이 눈과 귀를 모으고 촉각을 세우는 상황이었다. 회의는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리조트 정원에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총지배인 집무실의 방문이 열렸다. 강 전무가 먼저 나오고 잠시 후 기획실 이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 나왔다. 강 전무는 다소 피곤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던 총무부장에게 지시했다.
“내일 오전 10시, 현장에 필요한 인원만 빼고 팀장급 이상 모든 직원들 대회의실로 모이라고 하게. 총지배인님이 직접 발표하실 게 있으니.”
사람들이 제각각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이 기준과 안젤라는 총지배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총지배인은 혈색이 좋았다.
“그렇게만 되면 멋진 대안이 되겠어.”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가 리조트를 살리려면 지역 환경과 공존하고 상생해야 한다고 했지? 무엇보다도 왕위앙 지역의 지역적 고립성을 극복하는 데 기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루앙프라방이나 위앙짠 등 주요 거점 도시와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고 했지? 우리 리조트가 공간적 거리감, 시간적 거리감을 줄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자네는 링크빌리지와의 파트너십을 그 첫걸음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총지배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준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기준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이번에는 안젤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안젤라, 네가 루앙과 함께 구상하고 있는 그 생태치유마을이 성공한다면, 중간 경유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저 친구의 제안은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총지배인은 두 사람을 나란히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자네들의 이런 노력을 일단 ‘시간과 공간’ 차원의 인사이트라 부르고 싶네.”
기준은 일단 총지배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는 사람 즉, ‘인간’ 차원의 인사이트가 이어져야 할 게야. 왕위앙의 기존 여행 프로그램도 이제 단순한 위락 프로그램의 차원을 넘어 사람들 사이의 내면적인 교류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그건 기준이 최근 고민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총지배인의 입에서 인사이트 라오스에 대한 설명을 듣자니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누군가는 조직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근무시간을 바꾸고, 어느 회사는 일하는 방식에 혁신을 가하기 위해 본사를 서울에서 지방으로 옮기고, 어느 예술가는 창조적인 발상을 위해 만나고 교류하는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변화를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은 결국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라는 세 가지 차원의 ‘사이’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총지배인의 이야기는 다시 한 고개를 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 인간을 삼간(三間)이라 부르지. 우리의 삶은 이러한 3간이라는 조건의 결과물 아니겠나.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3간의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가?”
기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총지배인의 말에는 그 만큼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안젤라 역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자네들의 행동이 바로 그걸 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보려 한다는 걸 깨달았네. 그래서 나도 동참해 보려는 것일세.”
삼간은 무엇이고 살아가는 방식을 바꾼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게다가 총지배인이 우리와 동참하겠다니 그건 또 무슨 뜻인가. 기준의 머릿속에서는 신경세포들이 일제히 의미망을 훑으며 맹렬히 작동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총지배인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이튿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오전 10시, 총지배인이 대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 전무의 안내를 받은 총지배인은 제일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기준과 안젤라는 직원들 뒤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총무부장이 간단한 안내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굳이 궁금증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총지배인이 단상 마이크 앞에 바른 자세로 섰다. 심장 질환을 앓아온 환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함이 배어있는 몸가짐이었다. 맨 몸으로 남송리조트라는 패밀리를 시작해서 간난신고(艱難辛苦)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대부에게서만 뿜어져 나올 수 있는 엄격함과 인자함이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들 모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 여러분 모두를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첫 마디부터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부로 저는 이 리조트의 총지배인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납니다. 앞으로는 부지배인께서 정식으로 총지배인 자리를 맡게 될 겁니다.” 총지배인과 눈이 마주친 강 전무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안젤라가 가만히 기준의 손을 잡았다. 강 전무는 담담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동안 저는 우리 모두가 한 식구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회사가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느냐며, 위선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늘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식구(食口)라는 말에는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족 중에 누군가 밥을 먹기 어려울 때는 희생을 자처할 수 있어야 우리는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며칠 전 저는 리조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리고 리조트의 다른 식구들과 오래도록 함께 하기 위해 자신들의 밥그릇을 줄이겠다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총지배인은 자리에 앉은 현지인 직원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사람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저는 진정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는 예나 지금이나 리조트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리조트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이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을 모두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야망, 그 야망 때문에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지금도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자만심, 저의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집착을 벗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총지배인은 잠시 말을 끊은 뒤 좌중을 훑어보다가 누군가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다행히 여러분은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제가 가족의 일원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인생을 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주었습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보는 새로운 차원을 저에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리조트의 미래를 위해 외딴 산간마을에서 땀 흘리고 있는 가족들도 와있습니다. 이제 저는 그들과 함께 하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제가 총지배인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슬퍼하지 말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해 총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회의실 내에 숙연한 기운이 가득했다. 수군대던 소리도 완전히 사라지고 에어컨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낮은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리조트의 고문으로서 여러분을 응원할 생각입니다. ……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곳을 존경받는 리조트, 진정한 의미에서 명품 리조트로 만들기 원한다면 ‘인사이트라오스’의 정신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닥치고 상황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인사이트라오스’의 순수한 뜻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뜻을 가슴에 담아주신다면 저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아이 미스 남송리조트, 감사합니다.”
마침내 말씀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총지배인이 인사를 하고 앞자리에 다시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한참 후에 총무부장이 회의가 끝났음을 알렸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몇몇 현지 직원들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 둘씩 총지배인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수 십 명의 현지 직원들이 총지배인을 에워쌌다. 리엔을 비롯한 현지인 팀장들의 얼굴이 보였고, 그 사이에 특별히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루앙이었다. 자세히 보니 앞 쪽에 둥글게 모인 사람들 틈에는 링크빌리지에서 함께 땀을 흘리던 청년들의 모습도 보였다. 기준은 본능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싶더니 어딘가에서 읊조리는 듯 나지막한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총지배인을 둘러싼 라오스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라오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짬빠 므앙 라오’, 기준에게도 익숙한 멜로디가 나직하게 회의실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나서던 사람들도 몸을 돌려 모두들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 소리는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여린 곡조임에도 오히려 흥겨움이 묻어날 정도였다. 어느 사이 노래 소리가 대회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묵묵히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하나 둘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라오스의 아름다운 국화를 노래하며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가사는 마치 총지배인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반복되며 메아리가 되어 끝없이 울려 퍼졌다.
“이렇게……, 이렇게 꼿꼿이 서서 은퇴 성명을 발표하시려고 그토록 열심히 운동하셨던 건가.”
울컥해진 기준이 회의실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안젤라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기준이 재빨리 안젤라를 뒤 따라 나가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으로 당신의 뜻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된다면…….”
어느 새 두 사람 곁에 다가온 루앙이 말을 걸었다. 그의 말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으로 다 된 걸까요?” 안젤라가 물었다.
“마음을 열고 서로를 믿고, 그렇게 되면 같은 뜻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죠.”
“겨우 한 걸음이요?” 루앙의 말에 조금 김이 빠져버린 기준이 다시 반문했다.
“꾸준한 한 걸음이 천리를 가는 거죠. 하하.” 자기도 무안했던지 루앙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걸음으로 리조트 매각이라는 거대한 사막도 건너갈 수 있을까요?” 안젤라가 여전히 진지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매각을 막을 수 없을지는 모르죠. 하지만 리조트의 주인이 누가 되더라도 우리는 리조트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총지배인님이 먼저 큰 걸음을 떼셨잖아요.”
그렇다. 총지배인은 그래서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라오스에서 이룬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했다. 총지배인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그들에게 되돌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마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처럼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기준은 총지배인이 이렇게 은퇴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총지배인에게 그러한 결심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양 죄책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제 오늘 시간이 지나면서 총지배인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건 총지배인의 결심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그리고 그 결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총지배인을 찾아 집무실이며 정원이며 이곳저곳을 헤매던 기준은 코끼리 사육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거기, 텅 빈 사육장 앞에 총지배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코끼리는 꼭 돌아 올 겁니다.’ 기준은 달려가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기준은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범접하기 어려운, 깊은 사색에 잠긴 듯 했다. 총지배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왜 리조트 직원들을 그토록 가족으로 대하고 싶은 걸까. 안젤라는 삼촌의 개인적인 가족사를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기준으로서는 이제는 모두 이 세상에 없는 아내와 자식들이 그에게 얼마나 아픈 상처로 남아있을 지 감히 짐작만 할 뿐이다. 문득 기준은 그 동안 그가 겪었을 고통과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어졌다. 기준은 그대로 그렇게 멀리서 한참 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잔잔한 호수를 한 없이 바라볼 때 느끼는 평안함이 주위에 가득 퍼졌다. 낮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동쪽 하늘에 까욱까욱 하며 검은 새가 날아갔다.
총지배인을 배웅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기준을 반기며 변형섭이 말을 건넸다.
“거래가 오간 모양이야.”
“응?”
“총무부 사람들 오가는 밀담을 좀 엿들었는데…….”
구석의 작은 회의실로 기준을 끌고 가며 형섭이 말이 이어졌다.
복귀 대신 은퇴를 선택하면서 총지배인이 본사에 제시한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했다. 강 전무가 총지배인이 되어 리조트 매각을 막아달라는 것, 아니 최소한 보류시키도록 힘써달라는 것이 첫째이고, 매각이 되더라도 직원들의 자리를 보장해달라는 것과 기준의 본사 귀환 명령을 철회해달라는 것이 그 다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소식이 있어.”
형섭이 목소리를 낮추며 기준의 눈치를 살폈다.
“김 형,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체 하는 거야?” 기준이 표정 없이 듣기만 하자 형섭이 다그쳤다.
“무슨 말이야?”
“좋아, 이왕 말을 시작했으니 탁 까놓고 이야기 하지. 총지배인이 소유하고 있는 리조트의 지분을 직원들에게 분배하겠다고 하셨다는 거야. 그 일 때문에 본사 기획실의 이사님이 급히 오셨고.”
형섭은 말을 던져 놓고 다시 기준의 표정을 살폈다.
총지배인은 리조트 법인 전체 주식의 30 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그룹의 회장 다음으로 대주주인데, 그는 ‘인사이트라오스’에 그 지분을 모두 투자하겠다고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리조트 직원들이나 링크빌리지의 주민들에게 자신의 지분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인사이트라오스’를 실현하겠다는 것이 총지배인의 의중이었다. 어제 오후 총지배인이 귀띔을 해준 내용이었다.
“…… 통할까?”
기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역시 그렇군. 자네도 알고 있었어. …… 직원들이 리조트의 지분을 가지게 되면 위에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런데 총지배인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지? 그게 영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기준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도저히 믿기지 않았었다. 그러니 총지배인의 깊은 뜻과 전후의 속사정을 모르는 변형섭이야 오죽하랴. 그건 강 전무나 본사의 기획 이사도 마찬가지이리라. 아마도 회장도 총지배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기준은 총지배인의 결단을 환영하고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렇겠지. 그런데 강 전무님은 뭐라고 하셔?”
기준이 강 전무의 집무실 쪽으로 턱짓을 하며 말했다.
“재미있는 건, 강 전무님은 회장님의 경영 스타일을 조금 못 마땅해 하는 것 같아.”
“그건 무슨 뜻이지?”
“회장님이 가끔씩 자신의 개인적인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느라 냉정한 현실의 이익을 외면한다는 거야. 그룹이 이렇게 위기에 빠진 것은 회장님의 그런 ‘착한 남자병’도 한 몫 했다고 보는 것 같아. 그래서 이번에 총지배인님의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
“걱정이 되시겠군. 역시 냉정할 때는 칼 같이 냉정하신 우리 강 전무님다운 반응이야.” 기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강 전무님이야 언제나 자기의 길을 가고 있으시지.”
“이제 곧 성수기야. 카지노 투어가 핵심이니까 거기에 집중하도록 하게.” 기준이 강 전무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카지노 투어라고? 본사로 돌아갈 사람이 그건 어떻게 알아? 꼭 본 사람처럼 말하네.” 형섭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사실 지난 주 부터 얼핏얼핏 그런 이야기를 꺼내셨어. 이번 시즌은 카지노 투어를 준비해야 한다고.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카지노투어는 이제까지 무사오리조트가 집중적으로 추진하던 거잖아.”
“그게 뭐가 이상해?”
“아니, 지난 번 다큐멘터리 사건 이후로 무사오리조트는 카지노 투어를 접었어. 그런데 이제 보니 아주 접은 게 아니네. 강 전무가 그걸 받았으니까.”
“수익성을 노린다면 누구라도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 테지.”
“물론 라오스에서 카지노는 아직 시작 단계이지만, 중국이나 화교 자본이 가장 눈독을 들이는 것인데,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텐데.” 형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미 무사오 측하고 암암리에……?”
기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직은 몰라. 내가 너무 신경과민인지도 모르지. 좌우지간 이번 성수기 동안 뭔가 많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형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섭과 헤어진 기준은 모처럼 리조트 주변 산책길을 걸었다.
리조트에 근무하며 수 없이 걸었던 오솔길. 그 길은 누군가의 굴곡진 인생처럼 굽어졌다 펼쳐지고 좁아졌다 다시 넓어졌다. 인생은 언제나 수많은 갈림길과 만나고 예측하기 힘든 우여곡절 속에 흘러간다. 그래서인가, 굳이 총지배인님 정도의 내력이 없더라도 얼마쯤 인생을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꼭 해결하고 싶은 회한이나 미련, 혹은 의무 같은 것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기준은 자신에게는 어떤 미련이 남아있을지 궁금해졌다. 라오스에서 겪은 일들이 하나 둘씩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늘은 천지를 물들이는 붉은 빛 노을처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아직은 미련보다 열망이 더욱 크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인가. 신비하리만치 고요하고 상쾌한 저녁이었다. 멀리 푸른 잔디 위로 석양의 진홍빛이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