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0회
④ 혼돈
시공회사의 보수공사 팀이 오기로 한 날. 이른 아침, 기준은 코끼리 사육장이 보이는 방갈로 공사장에 나와 앉았다. 일과가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강 건너 산기슭에는 구름과 안개가 경계를 없앤 채 남쪽으로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고 가까운 물 쪽으로는 길고 좁은 나무배 몇 척이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움직이며 아침 낚시에 열심이었다. 그런가 하면 모닝 마켓에 내다 팔 고구마며 채소를 잔뜩 실은 배들이 간간이 지나갔다. 그럴 때 마다 배 위의 원주민 아낙들은 어김없이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둘러보니 어린 승려 몇이 강가에 나와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보수공사 팀은 약속 시간을 삼십 분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 때문에 공사 팀이 도착하면서부터 리조트 현장은 말씨름으로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기준은 지각을 문제 삼을 겨를이 없었다. 그들에게 현장의 심각성을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선 가장 시급한 임무는 물난리를 겪었던 레스토랑의 전면적인 복원과 객실 전체를 대상으로 한 누수 탐지 작업이었다. 기준은 시공사 직원들과 함께 늦은 밤까지 레스토랑과 객실들을 분주히 오갔다. 1조 팀원들이 누수탐지기를 들고 객실을 돌아다니는 동안 2조는 레스토랑 천정의 배관을 교체했고, 나머지 인원은 레스토랑 내벽과 조명시설을 점검했다.
설계도를 들고 호텔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기준은 빠른 속도로 업무를 파악해 나갔다. 깊이 파고들수록 호텔 건물의 마무리 공사를 서둘러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건물 구조에 미치는 영향까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성공적인 개관을 위해서 신경 써야 할 사항들 적지 않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런 과정에서 기준은 직원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즉흥적이고 독단적인 총지배인의 운영방식이 불만으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안티 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인물이 있었다.
변차장은 붙임성이 좋았다. 며칠 사이 기준은 그와 함께 두어 번 술을 마시는 동안 어느새 ‘김형, 변형’하며 말을 놓게 되었다. 나이는 기준이 한 살 많았지만 학번으로는 변형섭이 한 해 선배라며 술을 빌어 편한 사이가 된 것이다.
“김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변형섭이 기준에게 말했다.
“개관 일정에 맞추다 보니 정신이 없네.”
“총지배인 스타일에 너무 맞추려고 하지 마. 점점 피곤해질 뿐이니까.”
“그런가? 어쨌든 나 때문에 일정이 늦어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갈수록 기준은 시공사 직원들을 다그치는 일이 잦아졌고, 그 과정에서 큰소리가 오가기도 했다. 사실 기준에게 주어진 일은 과도했다. 레스토랑 보수공사는 호텔 개관 업무의 한 부분일 뿐이었고, 시설부 매니저로서 호텔 전반에 걸쳐 차질 없이 점검 작업을 병행해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에어컨이나 냉장고, TV 등 전 객실을 대상으로 한 전력 공급 테스트에서 상당한 문제점들마저 발생한 상태였다.
이따금씩 총지배인과 맞닥뜨릴 때는 안젤라의 얼굴이 겹쳐지곤 했다. ‘조카가 하는 일을 알고는 있을까?’ 업무보고를 할 때마다 총지배인은 기준에게 ‘해낼 수 있겠나?’ 하고 버릇처럼 묻곤 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어느 틈에 ‘할 수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입에 붙어버렸다. 그러나 그건 총지배인에게 하는 말이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일 터였다.
?
총지배인은 이 분야의 전문 인력도 아닌 기준에게 그 모든 일을 떠맡기고 있었다. 보다 못한 변형섭이 총지배인에게 사정을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기준은 그를 말렸다.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 일단 어떡하든 호텔 개관까지는 이대로 밀고 갈 생각이야.”
변형섭의 표정이 구겨졌다.
“듣던 것과는 참 다르군, 김형.”
“무슨 소린가?”
“상관의 지시라 하더라도 불합리한 상황에는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변형섭은 기준이 총지배인에 대해 지나치게 순종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어차피 이런 상황은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발생한 것이고 일단은 발등의 불부터 꺼놓고 볼 일이지.”
기준은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궁색하게 느껴졌다.
“그게 바로 총지배인의 방식이야. 늘 전투 상황을 먼저 만들어놓고 직원들을 거기다 투입하거든. 두고 보면 알겠지만 호텔 개관 이후에도 여유가 생기지는 않을 걸세. 1년 365일을 위기상황으로 규정하고 직원을 통제하는 것, 그게 총지배인 스타일이니까.”
며칠 뒤 총지배인이 기준을 불렀다. 그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본사에서 임원들 몇이 방문할 걸세.”
그것은 직원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20여일 뒤로 예정된 호텔 개관을 일주일 앞두고 사전점검 차원으로 본사의 임원들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총지배인은 기준에게 각별히 준비에 신경을 써야 할 거라며 지시했다. 그런데 어조나 분위기로 보아 일방적인 지시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까웠다.??????
그때 비서 역할을 겸하고 있는 여직원이 들어왔다.
“서울 본사의 강 전무님 전화입니다.”
수화기를 든 총지배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준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군요. …… 일정은 확실합니까?”
총지배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어. 이제 일이 더 급하게 되었어.”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방문 중이던 회장 일행이 격려 차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몇몇 임원들의 사전점검으로 끝날 일이 회장의 방문으로 인해 정식 행사처럼 되어버린 셈이었다. 총지배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개관까지 남아 있던 20여 일의 준비 기간이 갑자기 보름으로 줄어든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