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34회


“김형, 이것 좀 봐.”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상기된 표정의 변형섭이 기준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건 예약확인서였다.

“4박 5일 VIP 골프투어?”

“메이저급 방송국 국장을 비롯해서 전, 현직 언론사 임원들, 여행사와 국내 호텔 임원들까지 전부 강 전무 인맥이야. 예약한 객실 등급은 물론 조, 석식 메뉴며 부대시설과 골프코스 투어 예약까지 그야말로 초호화 풀 패키지인 셈이지.”

“멤버들 화려하네. 우리 리조트 입장에서는 좋은 경험이 되겠군. 정신 바짝 차려야 하겠어. 그런데 이거 설마 판촉행사는 아니겠지?”

“강 전무님이 오래 전부터 공들여 온 아이템이라니 어련하시겠어.”

서류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이거 날짜가 겹치잖아?”

변형섭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으쓱했다.

“내 말은 날짜가 왜 이렇게 잡혔느냐 이거야. 연수단 일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거잖아. 강 전무님도 일정은 훤히 꿰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됐지? 이거 일정 조정이 안 되나?”

기준이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변형섭이 말을 덧붙였다.

“전무님이 골프투어 행사를 나보고 진행하라더군.”

“뭐라고? 변 차장이 골프투어를 진행하라고?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

기준의 어이없어 하는 얼굴을 마주보며 변형섭은 할 수 없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담당은 따로 있지. 다만 워낙 VIP 손님들이라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실수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지원하라는….”

“솔직히 혼란스럽네. 기업연수단 행사만 해도 우리 리조트로서는 처음이라 준비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그런데 전혀 성격이 다른, 중요한 행사가 기간이 겹치도록 유치가 되다니. 게다가 변형은 전체 시스템을 관리하는 포스트인데 골프투어까지 지원하라니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번의 지시는 평소의 강 전무님답지 않아. 총지배인님을 닮아 가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강 전무님이 나의 골프 실력을 높이 사신 것 같아.”

“변 형,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이건 정말 큰일이라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김 차장은 어차피 기업연수 프로그램에 올인 해야 할 거고, 문제는 난데, 두 가지 행사를 한꺼번에 치루는 게 버겁기는 하겠지만 지금 내 입장에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감수하면 되는 건가?”

“그래, 이번에 청 테이프 역할 제대로 해 보려고.”

“청 테이프의 역할?”

강 전무가 성사시킨 골프투어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리조트의 영업망을 넓혀가려는 계산이 느껴졌다. 이번 VIP 초청행사도 당장은 외형에 비해 실속이 그리 크지 않은 행사일 수 있지만, 국내 시장에 리조트의 존재를 알리고 본사의 마케팅 활동을 지원하는 데는 의미가 없지 않다. 사실 이번 VIP 골프투어는 그 동안 강 전무가 추진해 온 전략을 본격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강 전무는 자기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기준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강 전무님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왜 하필이면 일정이 겹치는가 말이야.”

“그 양반들 일정을 맞추는 데 상당히 어려웠다는 소문이 있어.”

“아마도 변형은 훌륭하게 청 테이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청 테이프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더 합리적인 태도라는 생각이 드는군. 강 전무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판단하셨을 것 같은데.”

기업연수 행사는 이미 이십 여 일 이전에 확정이 되어있었다. 피하려고 했으며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청 테이프와 같이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청 테이프가 필요한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런데 강 전무님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그런 말이지?” 변형섭이 기준 대신에 생각을 정리해주었다.

“사실 우리 리조트에 합리적인 업무의 바탕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를 한 사람은 강 전무님일 거야.”

“강 전무님은 욕심이 많으신 분이야. 이제 청 테이프의 유연성마저 요구하시니 말이야.”

“그렇게 되는 건가? 꿈 보다 해몽이 좋군. 아무튼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청 테이프의 유연함을 갖춰야 하지만, 일을 하는 환경은 합리적인 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한다는 것. 그러니까 청 테이프의 유연함이 빛을 발하려면 합리적인 환경이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거지.” 기준이 덧 붙였다.

“유연함의 전제 조건이 합리성이라는 말인데, 그건 얼핏 모순적으로 들리지만 참으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 우리가 시스템을 설계할 때도 기본이 되는 것은 논리적인 합리성이거든. 그게 없으면 시스템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 물론 합리적 체계를 세상의 전부로 생각하면 다시 합리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지만 말이야. 어쨌든 합리의 바탕이 없으면 업무 시스템은 구축될 수가 없고 업무 현장은 혼돈으로 가득 찰 거야.”

강 전무의 업무 방식에 매뉴얼적인 합리성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다시 총지배인의 경험적 온정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 합리적인 기반을 구축하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총지배인의 업무 스타일은 물론 강 전무의 업무 방식도 어느 단계에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기준은 생각을 더 진전시켰다.

“유연성과 합리성은 서로 다른 덕목이지만 서로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인 것 같아.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유연성과 합리성의 관계가 아닐까? 예를 들어 시스템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서 운영의 유연성을 발휘한다든가 말이지.”

“아마도 그렇겠지. 아무튼 나는 오늘 김형과 이야기하면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 유연함이라는 차원에도 역시 논리적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것. 청 테이프의 유연함에는 전제조건이 있는데 그건 바로 최소한의 합리성이다. 그래서 이제 나의 결론이 무언지 알아? 청 테이프 역할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 변형섭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은 이제 개념놀이를 그만 하자는 신호이기도 했다.?

변형섭과 헤어진 후에 숙소로 돌아오는 기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상념이 맴돌았다. VIP 골프 투어는 기업의 단체연수를 추진하자는 총지배인의 제안에 대해 강 전무가 내놓은 대답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렇다면 강 전무의 대답은 결국 총지배인에 대한 무언의 영향력 과시가 아닐까.

“그 건 김 차장이 너무 예민한 거야. 내가 보기엔 총지배인과 강 전무님은 서로를 이기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배제하려는 건 아니야.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두 분은 점점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니까.”

변형섭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적당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비록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기는 하지만.

기준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생각의 끝자락이 향하고 있는 곳이 총지배인이나 강 전무의 의중이 아니라 직원들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기준이 걱정하는 것은 오픈한지 반년도 채 안 되는 신생 리조트에서 또 다시 두 세력이 기싸움을 한다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적당한 긴장은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그건 배터리가 전기를 발생하려면 두 전극 사이에 전압의 차이로 인한 적당한 긴장이 조성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다른 관점과 생각의 차이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원이 된다. 문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진전 없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갈등이다. 그러한 행태는 구태의연한 고집일 경우가 많고 대개 그로 인한 피해는 스트레스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직원들의 몫이었다.

기준의 합리적인 우려가 변형섭의 유연한 희망 보다는 현실에 가까웠다. 며칠 사이에 직원들 사이에 부쩍 긴장의 기운이 느껴졌다. 특히 연수단 행사에 주력하는 그룹과 골프 투어에 주력하는 그룹 사이에서는 의견 충돌이 잦아졌다. 이런 현상은 기업연수 추진 팀의 내부에서도 나타났다.

“캄샤이, 행사 시즌 때 인원 배치가 왜 방갈로나 VIP룸에만 집중돼 있죠? 여기 보세요, 일반 객실이나 연회장에는 딱 두 명뿐인데 말이에요.”

기업연수 추진 팀의 주요 멤버인 식음료 담당 매니저와 행사담당 매니저 사이에 말다툼이 들렸다.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어차피 연수 단체들은 야외 활동 시간이 많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에요. 예전에 주문한 단체 요리 재료들은 소식도 없는데 골프 투어 고객을 위한 재료들은 벌써 도착하고 있어요. 누군가 중간에서 순서를 정하고 있는 모양이죠? VIP 고객은 연수단 방문 3일 뒤에 오기로 돼 있는데 어째서 모든 일정이 우선적으로 잡혀있나요?”

행사담당 매니저인 캄샤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리엔,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손님이라고 모두 다 같은 손님이 아니에요. 좀 더 신경 써야 할 고객이 누군지 판단하세요.”

“왜 그래야 하죠?”

“알다시피 여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생 리조트예요. 홍보며 마케팅이며 모두 걸음마 단계란 말입니다. 우리가 좀 더 빨리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번 VIP 고객 유치에 다함께 집중해야 해요.”

“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내 말은 어느 한 쪽에 좀 더 충실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고객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리엔은 비록 과도한 일정이지만 이미 주어진 임무인 이상 두 행사 모두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어떤 고객이 이익을 가져올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기준은 리엔의 의견에 더 공감이 갔다.

캄샤이와 리엔은 우수한 이력을 지닌 만큼 라오스 직원들의 리더 격으로도 인정받고 있었다. ‘캄샤이는 인재야. 라오스 국립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포부가 만만치 않아. 리엔은 프랑스에 있는 대형 레스토랑에서 2년 정도 근무한 적이 있어. 둘 다 위앙짠이나 루앙프라방 지역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은 적이 있지.’ 변형섭이 두 사람을 팀원으로 추천하면서 들려준 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준은 특히 캄샤이의 야망과 포부에 대해 적이 놀랐다. 사실 그는 강 전무가 추구하는 방식을 가장 잘 수행하는 직원이기도 했다. 반면에 갸름한 얼굴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리엔은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고객에 대한 따뜻한 배려까지 더해 고객과 직원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를 편들고 할 때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미묘한 차이를 집어내기 힘들지만 직원들은 대부분 느끼고 있었다. 방갈로나 VIP 룸, 피트니스센터, 골프장 등 골프투어 고객을 위한 준비는 철저하리만치 대비하고 있었지만, 기업연수단을 위한 일반 객실이나 연회장, 비즈니스센터 쪽은 상대적으로 담당하는 인원도 적고 일일점검 절차도 간소하게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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