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0회
? MISS LAOS
동이 트기 전부터 요란하게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오전 내내 그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풍경이 물안개와 구름에 휩싸여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산봉우리를 휘감아 도는 구름띠는 시시각각 기묘하게 움직였고,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강은 점점 길어져서 마을의 경계는 저 멀리 아득하게 보였다.
행사가 끝난 이후 투숙객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게다가 바로 이어서 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50여 명 수준의 기업연수단 행사까지 연기되는 바람에 리조트가 거의 텅 빈 것 같았다. 서울 본사의 상품기획팀과 함께 애를 쓰고 있지만 추가적인 연수행사의 일정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미루어지고 있어서 당분간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비수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인가. 기준은 우의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평소의 습관대로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리조트를 한 바퀴 돌아본 기준은 호텔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호텔 쪽으로 다가가던 그는 뚝하고 걸음을 멈췄다. 현관에서 강 전무가 외부 손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는데 일행 중에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예전에 기준이 근무하던 여행사의 기획이사가 틀림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강 전무는 손님을 태운 차가 떠나자 잠시 하늘을 향해 한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기로 인한 환경변수가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리조트가 한산한 상황은 누구보다 강 전무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비록 한시적인 대행역할이지만 강 전무는 총지배인으로서 나름의 결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리조트의 하늘을 덮은 먹구름은 강 전무의 심사를 더욱 우울하게 할 터였다.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 강 전무는 리조트에서 가장 먼저 기상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조깅을 겸하여 리조트 전역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대개는 일과 시간 이전에 호텔 각 파트 점검까지 마치곤 했다. 그리고는 집무실에서 각 파트 부서장을 소집하여 업무 보고를 듣고 필요한 지시를 하는 연속 회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오전 시간을 사용했다. 하루의 중요한 내근 업무는 정오 시간 전에 마치고 그 이후에는 대개 사무실 밖에서 일을 하는데, 오후에는 아예 복장이나 신발까지 바꿔서 현장으로 출동하는 것이 강 전무의 업무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직원들은 정례 미팅 시간 외에는 좀처럼 강 전무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그것은 비교적 자유롭게 직원들과의 만남이 가능했던 오후 시간의 대부분을 낯선 방문객들을 맞이하여 장시간의 회의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리조트 밖으로 외출을 하기 때문이었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기준을 발견한 변형섭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할 얘기가 있어.”
“변형, 아까 보니까 본사에서 누가 왔다가는 것 같던데.” 기준이 먼저 강 전무가 배웅한 손님에 대해 물었다.
“강 전무님 손님이라면 본사의 기획이사님 말인가?”
“아, 그렇지. 지금은 본사의 기획실에 계시지.” 기준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본사의 기획실과 우리 리조트의 활성화 방안에 대해 협의가 있었던 것 같아.”
형섭은 기준을 프론트 뒤편의 빈 공간으로 데리고 갔다.
“그건 그렇고 김형, 캄샤이가 사표를 냈어.”
“뭐라고? 도대체 왜?”
“휴우, 루앙프라방에 있는 특급 호텔에서 전부터 이야기가 있어왔나 봐.”
“왜! 왜 하필이면 지금이지? 그것도 캄샤이가!”
기준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캄샤이가 자신과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 전무의 총애도 있고 해서 이렇게 빨리 리조트를 떠날 것이라고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캄샤이는 리조트의 직원들 중 드물게 전문 교육을 받고 제대로 경험을 익힌, 이를테면 엘리트 직원이었다. 기준은 자신의 방심을 자책했다.
“캄샤이와 가까웠던 직원들을 만나보자.”
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캄샤이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평소에 그를 따르던 두 명의 직원도 며칠을 사이에 두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들 중 한 명은 경쟁사인 무사오 리조트로, 다른 하나는 루앙프라방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 전무의 트레이닝을 가장 잘 견뎌낸 직원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웠다. 갑작스럽게 세 사람이 리조트를 떠나자 다른 직원들까지 술렁거렸다.? 리조트는 비수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직원들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예전의 가족적인 분위기까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직원들이 일터를 옮기니 일반 직원들은 물론이고 간부직원들 사이에서도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표면상의 동기는 총지배인 대행이 된 강 전무와의 마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근거가 빈약했다. 그들은 오히려 강 전무의 방식을 존중하고 더 없이 충실하게 따랐던 직원들이었다. 그나마 믿을 만한 이야기는 리엔의 입에서 나왔다.
“좀 이상하긴 한데 부지배인님 방문이 항상 닫혀 있는 게 늘 불안했대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러다 방문이 열리는 날이면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업무지시가 던져지곤 했다는 거죠. 사람들은 그 방문을 원사이드 도어라고 불렀지요. 안에서 열고나올 수는 있어도 밖에서 들어갈 수는 없는 문.”
“아니, 그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변형섭이 웃었다.
“그리고 …… 강 전무님이 평소에 냉정하신 편이잖아요.” 리엔이 설명을 덧붙였다.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관심을 보이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칼 같이 자르시고. 전무님의 관심은 오로지 본인의 생각뿐이라고, 캄샤이가 전무님을 무서운 분이라고 했대요.”
“그럼 무서워서 떠났다는 거야?”
기준과 형섭은 씁쓸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캄샤이를 비롯해 직원들의 이직이 벌어지는 데도 강 전무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서울 출장을 다녀온 후 열린 정례적인 간부 미팅 자리에서 그는 서울 본사를 통해 라오스뿐만 아니라 동남아 전 지역에 걸쳐 인재들을 충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우수한 직원이 빠져나갔으니 더 우수한 인재들로 대체한다, 이건가?”
회의실을 나오며 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마저도 이젠 쉽지 않아. 어제 본사에 전화해봤는데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 제 2의 IMF가 오기라도 하는지, 장기 불황이 시작된 거 모르냐며 자기들도 비상이라고 엄살을 부리더군. 더 이상의 지원은 어려울 거라고 하던데.”
“직원 문제는 그렇다 치고, 강 전무가 구상하는 플랜들도 여럿 있을 텐데.”
“아무래도 우리의 문제는 라오스의 왕위앙이라는 지역적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는 점이야.” 변형섭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투자를 하기에도, 사업 아이템을 연계하기에도 너무 고립되고 왜소한 곳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왕위앙의 한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건 인정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돌파해야 할 대상이라고. 그리고 솔직히 예전보다는 지금이 얼마나 환경이 좋아졌어? 인천과 위앙짠 직항노선도 개설되고 한국 관광객만도 3만 명이 넘었잖아.”
“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 ” 변형섭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닫았다.
“그건 그렇고 요새 강 전무님은 왜 모든 것들을 혼자서만 감당하려고 하시는 느낌이 들지?”
기준은 답답한 심사를 드러냈다.
며칠 뒤 기준은 기업연수단 유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강 전무의 방문을 두드렸다.
“여길 아예 기업 연수 전문 리조트로 만들 생각인가?”
기준이 운을 떼자마자 강 전무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기업연수단 이외에도 여러 행사를 적극적으로 유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종 확정 단계에 있는 행사의 일정 등 핵심 사항을 보고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회의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자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해외 유명 리조트의 홍보책자와 사진들,?성공 사례에 관한 문서,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 내륙 물류와 라오스 투자 계획 같은 자료들이 방 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리조트는 고객이 만드는 거야. 고객의 수준에 따라 리조트의 수준도 결정되는 걸세. 만일 자네가 여행객이라면 수십, 수백 명의 단체객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묵고 싶겠나?”
“객실이 점점 비고 있습니다. 별다른 비수기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이상 연수단 유치 계획은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강 전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연수단은 유치하되, 봉사활동 프로그램은 빼도록 하게.”
“예? 이유가 …… ,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이런 우기에 건축 활동 같은 외부 활동은 어차피 불가능 하지 않은가? 지난번에는 다행히 운이 좋았지만.”
“봉사 프로그램은 연수단 행사의 핵심입니다. 외부 활동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실내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준의 대답을 듣는 강 전무 얼굴에 짜증기가 나타났다.
“본사에서 내려온 지시야.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회사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네. 지난 번 연수단 다녀간 뒤에 본사에 어떤 얘기가 돌고 있는지 아나?”
“어떤 얘기 말인가요?”
“리조트 개발 때문에 쫓겨난 원주민들을 위해 마을을 건설하는데 왜 엉뚱한 회사가 봉사활동을 하느냐, 자기 회사에서 해야 할 일 아니냐는 걸세.”
“저도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사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연수단을 유치할 계획…….”
“본사 연수 계획은 자네 맘대로 좌지우지 하나?”
“그건 본사의 인력개발팀, 상품기획팀과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강 전무가 기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을 던졌다. “자네 지금 본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나 하는 말인가?”
기준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무엇엔가 기가 눌린 기분이었다.
“…… 아무튼 대기업 임원진으로 특화하되 비수기에만 적용되도록 조정하게. 봉사활동 프로그램은 빼고!”
그로부터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객실부와 식음료부서의 직원 두 명이 추가로 사표를 냈다. 이번에는 자진 사퇴가 아니었다. 강 전무가 타이의 한 호텔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라오스 출신 호텔리어를 영입하기 위해 현재의 인원을 줄이는 쪽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변 차장과 강 전무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강 전무 방으로 달려가던 기준은 형섭의 격앙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직원이 끼웠다 뺐다 하는 부속품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스타플레이어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이야말로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이 빠져나가면 또 다른 곳에서 누군가를 끌어와야겠죠. 그렇게 계속해서 공백을 메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그 조직은 영원히 답보상태에 머물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유능한 직원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체 직원들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또 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만들고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기준은 변형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강 전무의 결정은 번복될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