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1회

기준은 점점 일하는 기계처럼 변해갔다. 휴식은커녕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뛰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도 그는 불을 끄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역시 절대시간이 부족했다. 기준은 회장의 방문 날짜에 맞춘 최종 점검표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D-5 환기 시스템이 정상화, D-4 바 천정 누수 문제가 해결, D-3 스위트룸 바닥 공사가 마무리, D-2 레스토랑이 정상 가동. D-1 호텔 시설 점검 완료.’

“이해할 수가 없군. 레스토랑만 복구하면 팔부능선은 넘은 거 아니었나?”
업무 진척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총지배인이 물었다.??
“환기 시스템부터 각종 배선들까지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총지배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김 차장, 자네 도대체 어쩌자고 일을 자꾸 벌이는 겐가?”
총지배인은 애써 화를 누르며 다시 물었다.
“누수 탐지 결과 몇 군데 라인에도 신호가 잡혔고 또…….”
“이거 원, 임원진 방문 일정이 떡하니 잡혀 있는데 그렇게 계획성 없이 움직이다니. 자네 이렇게 고지식한 사람인줄 몰랐네.”
기준이 가슴에서 치미는 기운을 누르고 있는데, 변형섭이 끼어들었다.
“애초에 빠듯한 개관 예정일에 맞춰 진행해온 일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오신다는 이유만으로 작업 일정이 다시 앞당겨진 것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심사가 뒤틀려진 총지배인은 변차장과 기준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래, 잘도 아는군. 그렇다면 말해보게. 자네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건가?”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제 각기 생각에 빠졌다.
“여기서 더 이상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금 여유를 갖고 원래 일정대로 진행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이번에도 변 차장이 침묵을 깼다.
“개관은 날짜보다는 완성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총지배인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지금 고삐를 늦추면 개관 날짜가 아예 뒤로 연기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기준은 곤혹스러웠다. 총지배인의 고민은 단순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임시방편으로라도 일단 일을 마무리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때 변형섭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일단 임원진 방문을 무사히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전면적 검토는 일단 덮는 것으로 하지요.”
기준이 놀라 변형섭을 쳐다보았다. 총지배인도 변형섭의 반응이 의외라는 눈치였다.???

총지배인은 리조트 부대시설 공사 현장의 인부들까지 호텔로 불러들였다. 가능한 인력을 총동원하여 눈앞에 닥친 모든 작업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그날 이후 기준은 한 동안 변차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한 마디는 내내 기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무리해서라도 개관해야 한다는 총지배인의 생각에 늘 반기를 들었던 그가 돌연 입장을 바꾼 까닭이 무엇인지 기준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입으로는 할 수 없었던 말을 대신 해준 그가 고맙기도 했다.
훗날 변형섭은 이 기간을 혼돈의 일주일이라 불렀다. 시설부의 직원들과 리조트 현장 인부들은 물론 하우스키핑 부서와 현관, 프런트오피스 등 객실부서 직원들까지 업무 영역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전쟁 같은 일주일이 지나고, 기준은 쏭강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밤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내일이면 회장 일행이 도착하는 날이다. 라오스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일이 주어졌고 상황에 밀려 그 일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시키는 사람의 목표는 있었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은 의미를 찾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양심마저 타협하며 몇몇 군데의 마무리 공사를 그냥 덮어둔 상태였다. 마음이 무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의 강행군은 어쩌면 총지배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그를 휩싸고 돌았다.? 나는 왜 총지배인이 나를 지배하도록 자청하고 있는 것인가.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힘든 시간을 보내셨군요.”
루앙이었다.
기준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안젤라를 만나고 온 뒤로 루앙과 단둘이 마주앉기는 처음이었다.
“안젤라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루앙은 주중에는 리조트에서, 그리고 주말은 오지마을에서 보내고 있었다. 기준은 그런 루앙의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안젤라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메신저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당신을 걱정하더군요. 안젤라는……, 아시다시피 라오스 환경에 익숙하니까.”
“그런 곳에 마을을 건설하려는 까닭이 뭡니까? 하필이면 그런 오지에.”
강 쪽을 바라보던 루앙의 시선이 기준에게 돌아왔다.
“안젤라와는 같은 장소에서 함께 마을을 만들고 있지만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다만 지금은 힘을 모으는 과정이지요. 또 언젠가는 뜻을 함께 할 수도 있고.”
“안젤라의 계획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쯤 그게 가능해질까요?” 기준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이상하군요. 안젤라 얘기로는 당신이야말로 많은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던데.”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마을을 건설할 정도의 능력은 없습니다.”
“여기도 처음에는 황무지였습니다.”
“이곳이 예전에는 몽족의 마을이 아니었나요? 황무지는 아니었죠.”
“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디나 황무지인 것이지요. 누구도 이곳에 리조트를 지으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루앙은 그곳에 원주민을 위한 리조트라도 짓겠다는 것인가요?”
기준은 격앙되어 가는 자신을 추스르려 애를 썼다. 루앙은 즉답을 피한 채 손을 들어 코끼리 사육장을 가리켰다. 기준은 어스름 윤곽뿐인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코끼리들은 어릴 때 단 한 번 가본 길을 50년이 지난 뒤에도 정확히 찾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를 잘 압니다.”
루앙은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면 볼수록 큰 덩치만큼 깊은 지혜를 지닌 동물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의 바람소리, 물소리, 풀과 꽃 냄새로 기억을 되살려 가장 옳은 길을 분별합니다. 그런가 하면 늘 먼 곳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늠하지요. 그렇게 해서 지평선 너머 아주 멀리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찾아가는 겁니다. 확실히 길을 제대로 걸을 줄 아는 동물이지요.”
“정처 없이 헤매는 게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코끼리가 사람보다 낫군요.”??
“저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하나하나의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걷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들은 그 큰 한 걸음에 길의 처음과 끝이 모두 들어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이 처음에 길을 잘 출발했다가도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왜일까요?”
“그건 처음 길을 떠날 때의 목적을 길을 가는 과정에 잃어버려서 아닌가요?” 기준이 말을 받았다.
“그렇지요. 그런데 코끼리에게는 걸어가는 길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와 따로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출발하고 매일 도착한다면, 매순간 시작과 끝이 함께 있다면, 한 걸음 안에 출발과 목적이 모두 있다면 어떻게 될까, 코끼리를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걸어가는 과정이 바로 목적이라면 잃어버릴 목적지가 따로 없는 것이지요.”
그을린 피부에 깡마른 라오스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마치 대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 소리와 같이 묘한 음색을 만들었다. 선율에 이끌려 듣다가 어느새 가사에 귀를 기울이듯 기준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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