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23회
리조트 오픈 당일. 회장과 사장, 임원들이 도착하고, 카이손 아마스를 비롯한 라오스 정재계의 내노라하는 인사들이 귀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가 열렸다. 예약한 투숙객들도 속속 도착하고, 오후에는 라오스 전통 공연과 만찬이 이어졌다. 기준은 자신이 초대한 두 명의 특별 손님, 박 대표와 무숙자를 위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쾌적한 객실 두 개를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객실을 낭비하지 말라며 한 방에 짐을 풀었다.
개장일 업무를 위해 강 전무가 숙련된 직원들을 선정해서 요소요소에 추가로 배치한 덕분에 오픈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지난 번 방문의 기억 때문인지 얼굴을 펴지 못하던 본사의 임원들도 회장의 흡족한 표정을 확인하고는 하나 둘 안도감을 드러냈다. 강 전무의 주도면밀함이 주효한 셈이다. 물론 그 시각에도 일상 업무를 맡고 있는 부서장들과 현장의 직원들은 열심히 물밑에서 다리를 젓느라 정신이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버사이드 룸을 예약했는데 왜 엉뚱한 방을 주느냐는 투숙객의 불만에서부터 인터넷이 느리다, 출입문 열쇠가 맞지 않는다, 욕실 수압이 너무 약하다, 주문한 룸서비스가 왜 안 오느냐는 등 크고 작은 불만 전화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당연히 직원들은 발생 가능한 긴급 상황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지만 실제 상황은 사뭇 달랐다. 사소한 언어 착오나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현장에서 그런대로 수습이 되었다. 그러나 개장 행사에 초대된 손님들이나 일부 투숙객 중에서 지나친 요구를 하거나 감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에는 경험이 짧은 현장 직원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모든 직원들이 익히기에는 절대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게다가 전체 업무를 시스템적으로 관리하는 라오 프로그램의 기능이 삐걱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조금씩 악화되고 있었다.?
호텔 로비의 프런트 부근에서 팀원들과 동분서주하는 형섭을 눈여겨보던 기준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 중 상당수가 객실부장인 변형섭의 임기응변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기준은 개장 행사에 참석한 건설관련 업체 인사들에 대한 응대를 마치자마자 바로 변형섭에게 달려갔다.
“변형, 여기 센터를 지키게. 움직이는 건 내가 할 테니.”
“고마워. 나는 여기를 한시도 떠날 수가 없네. 계속 연락할 테니 이걸 끼우고 있어.”
변형섭이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기준은 침착한 성격의 직원 세 명과 함께 호텔 객실과 연회장, 방갈로 등을 분주히 오가기 시작했다. 형섭은 시시각각 새로운 해결 사항을 알려왔고 그때마다 기준은 민첩하게 옮겨 다녔다. 그런데 현장의 라오스 직원들은 차분하다 못해 무심하게 보일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객실의 주문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어도 그들은 한 번에 방 하나씩만 차례로 노크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지금 235호 가는 중이지요?”
타월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는 여직원에게 기준이 물었다.
“예, 타월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요.”
“211호, 238호에서 계속 호출하고 있는데 가는 길에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그녀는 ‘아, 그렇군요.’ 하며 망연히 바라보기만 한다. 기준은 그 눈빛에 대고 더 이상의 채근을 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라오 프로그램의 ‘지침’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의 문제는 자기 몫이 아니었다. 프런트에 쌓여가는 불만의 리스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로서는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공연히 나서기가 꺼려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어떻게 돼가고 있나?”
만찬에 참석했던 강 전무가 프런트 뒤쪽의 관리실로 다가갔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미소를 띠고 손님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변형섭을 비롯하여 시스템을 관리하는 몇몇 직원들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현장 직원들이 아직 프로그램에 익숙하지 않아서…….” 변형섭이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뭔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강 전무는 관리실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변형섭에게 다가와 뭔가를 묻고 지시하기를 반복했다. 때때로 모니터를 가리키며 라오 프로그램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며칠 전까지도 잘 돌아가던 것이 왜 이렇게 자주 오류가 발생하나?”
강 전무의 질책성 지적에 프로그램 담당자가 슬그머니 변 차장을 돌아보았다.
사실 라오 프로그램에서 오류 발생의 빈도가 높아진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준의 지적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형섭은 프로그램에서 시스템적으로 통제되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현장의 사용자들이 직접 매뉴얼로 조정하는 기능을 추가하여 개장 며칠 전에 통합시켰는데 지금 그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고 있었다. 고객을 대하는 실무자들에게 세부 조정의 권한을 위임했는데 담당자들은 자신들의 선택권을 오히려 부담으로 느끼고 있었고, 필요한 데이터 입력이 누락되거나 조작이 잘못되면서 시스템 작동에 부하가 걸리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변형섭이 계속 모니터링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매번 수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전체적인 업무 흐름에 병목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현장의 상황 변수를 고려해서 프로그램을 개선한 것이 실무자들에게는 오히려 번거로운 일이 되어버린 것이고, 프로그램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마음도 준비도 없는 곳에 변형섭의 의욕만 앞서간 셈이 되어버렸다. 형섭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한 긴장 상황은 객실의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고 긴 하루가 지날 때쯤에서야 간신히 종료되었다. 하지만 강 전무와 변형섭은 그 때까지도 프런트 주변 소파에 앉아 뭔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일도 태양이 떠오릅니다. 못다 한 이야길랑 내일 하시지요.’ 기준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그런 말을 건네주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이었을 뿐, 기준은 발걸음을 돌려 호텔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야자수가 줄지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 넘어 쏭 강 위에는 보름달이 조용히 떠올라 있었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좀 줄이세요.’ 어디선가 루앙이 슬며시 다가와 잔소리를 할 것 같다. 하지만 바람소리뿐이다.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쓴 웃음이 지어졌다. 루앙이라는 존재가 마치 유령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아무도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준에게는 루앙이 만들어놓은 빈 공간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아니, 기준의 마음 한 구석뿐 아니라 오늘 하루 종일 현지 직원들과 함께 뛰어다닌 그 시간과 공간들은 일제히 루앙의 빈자리를 웅변으로 외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직원들은 왜 라오 프로그램에서 요구하는 지시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그들은 왜 라오 프로그램을 짐으로만 여기고 자신의 일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시스템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강 전무와 변형섭 저 두 사람은 라오 프로그램과 현장 사이의 거리, 그 빈 공간을 무엇으로 메워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왜 떠났을까’라는 의문은 어느 순간 ‘그는 왜 여기 있었을까?’로 바뀌어 버렸다. 리조트 일을 배우기 위해서라던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만큼 능숙한 일꾼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여기서 뭘 하려고 했을까? 루앙의 빈자리는 기준에게 끝없이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