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31회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업무를 정리한 기준은 링크빌리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국도에 들어서니 뜨거운 바람이 거침없이 들이쳤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시자 공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산을 넘어온 바람이 남국의 과일 향기를 실어 온 듯, 달콤하면서 찝찔한 그러면서도 혀를 톡 쏘는 망고의 맛에 침이 고였다. 채 익지 않은 망고를 달짝지근한 소스에 찍어 먹는 라오스 사람들, 어느 사이 기준의 몸은 막 무엉이라 불리는 라오스식 망고에 익숙해져 있었다.

옆 자리에 놓인 가방에는 라오스 전통 격자 문양이 새겨져있고, 그 위에 던져진 수첩에는 ‘링크 오브 라이프’라고 멋을 낸 제목자가 박혀있다. 저건 이제 내가 풀어야 할 문제의 제목이다.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의 제목이다. 산길을 돌고 돌아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을 달리는 내내 기준은 주문을 외듯 ‘링크 오브 라이프’를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 마치 숲 속에서 램프의 요정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는 제목이 있다. 그 제목은 콘셉트를 드러낸다. 제목이 없는 기획안은 없다. 그런데 인생에도 제목이 필요할까. 혹시 제목이 없는 인생은 콘셉트가 없는 기획안과 같지 않을까? 상념이 돌고 돌아 여기까지 이르자 기준은 흠칫했다. 얼마 후 기준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삶에 제목을 달아야 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도착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
링크빌리지에 도착했을 때는 살짝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야외 진료소 뒤쪽 숲으로 난 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땅을 파느라 분주했다. 산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물길을 내려는 것 같았다. 기준은 자기도 모르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웃통을 벗어젖힌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들 틈에서 자연스러운 라오스 말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익숙하게 삽질을 하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자 청년들 사이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역시 안젤라였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그녀는 빛이 났다. 타이의 어촌 남켐 마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기준은 그녀에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묘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다. 기준에게는 부족한, 그래서 가끔씩 그녀를 낯설게 하지만 분명히 그 재능은 서로 다른 삶이 만나서 새로운 삶을 만들게 하는 놀라운 은총이다. 링크 오브 라이프. 그녀는 기준에게 온몸으로 그 실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기준은 잠시 후 팔을 걷고 공사판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이리 줘요.”
그는 안젤라에게서 삽을 빼앗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안젤라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몽족 청년들이 기준에게 눈인사로 아는 체를 하며 함께 곡괭이질이며 삽질을 이어갔다. 기준의 능숙한 삽질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에 탄력이 붙은 듯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을 남자들과 어울려 일하는 기준의 모습을 바라보는 안젤라의 입가에 작은 꽃들이 피어올랐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여가던 노을이 끝자락을 감쳐 올린 후 주위가 완연히 어둑해질 무렵 루앙의 거처에 세 사람이 모여 앉았다.
“여러 가지로 뜻 깊은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루앙이 먼저 운을 뗐다.
“혹시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봉사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 나 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달려들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기준이 설명을 하는데 얼핏 안젤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봉사하는 여행 말이지요?” 안젤라가 우리말로 빠르게 물었다. 그리고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일 게다. ‘자꾸 봉사, 봉사 하지 마세요. 여기선 자원봉사란 말 안 써요. 그 대신 자원 활동이란 표현을 쓰죠. 봉사라뇨? 누가 누굴 돕는 건데요? 내가 얻는 게 더 많은데 봉사는 무슨 봉사?’ 기준이 타이에서 안젤라에게 서번트투어에 대해 설명했을 때, 봉사라는 말 대신에 활동이라는 표현을 쓰라고 야단쳤던 그녀였다.???????????????????

“물론 기준씨 걱정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 역시 루앙과 같은 의견입니다.”???????
안젤라가 웃음기를 지우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한국 사회에는 이미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고 의미 있는 문화를 체험하고자 하는 니즈가 상당히 형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되었든 단체가 되었든 서번트투어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제 단순한 여행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박 대표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기업 연수단을 대상으로 하는 서번트투어를 링크빌리지와 연결한다는 기본 계획에는 모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안젤라가 조금 더 그랬다.
“한 두 차례 왔다가 맥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오히려 혼란만 초래하고 공연한 불신만 키우게 되는 …….”???
“개인이 중심이 되었던 이전의 서번트투어에 비해 기업 차원의 서번트연수는 프로그램의 지속성이나 안정성 면에서 위험 요소가 적다고 봅니다. 초기의 세팅 과정이 제대로 되도록 치밀하게 진행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시작도 쉽지 않겠지만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겠지요. 결국은 신뢰의 문제입니다.”?기준은 계획을 성사시키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모두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단계별로 필요한 준비를 충분히 갖추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보장될 때까지 기다려야 될 일은 아니다’ 라는 것이 기준의 주장이었다.??
“만일 기업 연수단 활동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미스터 루앙의 계획도 힘을 받지 않을까요?”
기준이 화제를 조금 돌렸다. 그러자 안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스터 루앙의 계획이라면?”
루앙이 안젤라를 바라보더니 ‘때가 되었군.’ 하며 사무실로 걸어가더니 잠시 후 낯익은 박스를 꺼내왔다. 루앙이 박스 안에서 링크빌리지를 설계한 도면을 꺼내 안젤라 앞에 펼쳤다.
“김 차장님에게는 전에 한 번 보여드렸지요.”
루앙은 기준이 들었던 이야기의 핵심 사항을 하나씩 설명해나갔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안젤라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하셨는지 몰랐어요. 정말 훌륭하시네요.”
“때가 되기를 기다렸지요.” 루앙이 기준을 보며 말했다.
루앙의 말을 받아서 기준은 링크빌리지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만일 링크빌리지가 연결점으로서 제 몫을 해낸다면 루앙프라방과 왕위앙의 심적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질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리조트 입장에서는 셔틀버스를 이용한 관광 프로그램을 좀 더 확대할 수 있겠죠. 루앙의 말처럼 이곳이 또 하나의 관광지가 되고 그 거리는 더욱 좁혀질 겁니다. 물론 거기까지 논의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말입니다.”
“맞습니다. 일단은 이곳에 공식적인 버스 정류장을 설치하는 것이 첫 걸음이 될 겁니다.”
“그러자면 카이손 아마스를 반드시 설득해야 할 텐데, 이 정도로 가시화된 계획과 가능성을 제시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라오스에 대한 통찰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안젤라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군. 지금이야말로 통찰이, 인사이트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야.” 기준이 맞장구를 치자 루앙 역시 “인사이트, 인사이트”하며 반복해서 되뇌었다. 기준은 습관적으로 수첩을 펼쳐 ‘인사이트 라오스(Insight Laos)’라고 적었다.
세 사람 사이의 의논은 서로가 담당할 역할을 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기업 연수단의 방문에 맞춰 임시거처와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마련하는 것은 루앙의 몫으로, 봉사활동 이외의 프로그램은 기준과 안젤라가 맡기로 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마을에는 어둠이 짙게 깔렸다. 돌아갈 채비를 하는 기준에게 루앙이 말을 건넸다.?
“추진하다보면 반대 의견도 적지 않을 겁니다. 특히 전략이 바뀔 때는 좋든 나쁘든 반대가 거세지곤 하니까.”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기본업무를 익힌 직원들에게 더 큰 사명을 부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시간이 필요한 일이겠군요.”
“서로 믿음이 통할만큼의 시간이겠지요. 다른 이들의 믿음을 얻으려면 먼저 믿음을 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믿는 과정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테고.”
루앙은 처리할 일이 남았다며 숙소로 들어가고, 안젤라가 기준을 배웅했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삼촌은 좀 어떠세요?”
“그건 의사선생님이 더 잘 아시는 것 아닌가?”?
“기준 씨가 곁에서 자주 보잖아요.”
“당신 병을 잘 아시고 또 많이 조심하셔서 그런지 업무를 보시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그럼 좋아지고 있는 거군요. 그런데 이번 일, 오케이 할까요?”
“설득해야지. 그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지셨어.”
그러나 안젤라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그렇게 불안해 보여?” 기준이 서운한 내색을 하자, “불안해서가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러지.”
“그게 그 말 아닌가?
안젤라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미소 때문인지 기준에게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 안젤라는 내게 한 번도 짐인 적이 없었어.”
“…… …… ”
안젤라가 한 걸음 뒤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말이 없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나에게는 항상 든든하고 믿음직한 힘의 근원이라고.” 기준이 안젤라에게 돌아서며 말을 덧붙였다.
“나하고 외숙부가 관련돼 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럼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안젤라의 그 말에 기준은 조금 서글퍼졌다.
“아니, 그래도 했을 거야. 그리고 이제부터는 우리, 같이 일하는 거야. 따로따로 힘들어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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