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3회
③삶의 세 기둥
회장과 수행임원들이 떠나자 리조트 일대를 휩싸고 있던 긴장감도 쏭 강의 새벽안개처럼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에 평온한 일상이 재빠르게 찾아들었다. 총지배인의 호통소리가 줄어든 것 외에는 주의를 끌 만한 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어느 새 제각각 예전의 습관으로 복귀했다. 물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때면 어김없이 안개는 다시 피어올랐고, 긴장을 풀지 못한 채 힘들게 인생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호텔 개관 일정은 어차피 강 전무가 부임한 후에야 다시 정해질 것이다. 아무도 이 말을 공식적으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리조트 직원들은 모두 기존에 진행하던 부대시설 공사의 마무리 작업에만 신경을 썼다. 공사장에서는 고함 소리가 줄어들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예기치 못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직원 너 댓 명이 고열과 두통, 구토 등의 증상을 보이며 쓰러진 것이다. 평온했던 일상은 채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리조트를 빠져 나갔다. 현지인들은 뎅기열이라며 수군거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에 이상을 보이는 직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실 한 동안 격무에 시달리던 기준 자신도 긴장이 풀리면서 면역력이 방심을 한 탓인지 오히려 피로감을 더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불필요한 동요를 막으려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기준은 루앙을 서둘러 찾았다.
“안젤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기준은 현지 직원들에 둘러싸여 있는 루앙에게 차 열쇠를 건넸다.
“가서 데려오지요.” 루앙은 군 말 없이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준은 다음으로 총지배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사무실은 비어있었다. 직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변형섭 차장도 정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기준은 본사의 임원진이 떠난 뒤로 총지배인의 얼굴을 몇 차례밖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어디 가신 거야?’
그는 리조트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 현장에도, 숙소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앳된 몽족 청년 하나가 기준의 뒤에서 머뭇거렸다. 그는 총지배인 숙소에서 잡일을 보는 심부름꾼이었다.
“이봐, 쏭! 총지배인님 어디 계시지?”
기준이 그를 잡고 물었다.
쏭은 입을 다문 채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쏭, 급한 일이야. 직원들이 병으로 쓰러지는 것 너도 봤잖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지금 총지배인님을 꼭 만나야 해.”
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준에게 팔을 잡힌 채 앞장섰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강 건너 원주민 마을이었다. 숲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자 통나무로 지은 라오스 전통 목조 가옥 한 채가 나타났다. 쏭이 그 집을 가리켰다.
기준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한 방안에서는 약초 냄새가 진동했고 누군가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총지배인이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총지배인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기준을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검게 변한 얼굴 위로 진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총지배인 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 그냥 잠시 쉬고 있을 뿐일세. 별일 아니니까 소란 피우지 말게.”
기준은 직원들 여럿이 고열과 두통 등의 증세로 쓰러졌다는 보고를 하면서도 총지배인의 모습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어디 아픈 것 같나?” 총지배인이 손을 내밀어 기준의 팔을 꽉 잡았다.
“솔직히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이까짓 혈압 좀 높다고 쓰러질 것 같으면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네. 내가 이 정도로 물러설 것 같은가?” 총지배인의 강렬한 인광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김 차장, 한 가지 약속을 해줘야겠네.”
총지배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기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오늘 여기서 본 것을 밖에 알리지 말게.”
“총지배인님, 편찮으시면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아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총지배인의 눈빛은 절박했다. 기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조트로 돌아오면서 기준은 심사가 편치 않았다. 얼마 전 본사의 사장이 불쑥 던지고 간 말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 터였다. 그런데 총지배인까지 기준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심각한 병은 아닐까? 굳이 왜 숨기려 할까? 안젤라에게도 비밀에 부쳐야 하나?’ 기준은 총지배인에 대해 아는 바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은 그길로 변형섭을 찾아갔다.
“강 전무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지만 변형의 행동, 솔직히 서운하더군.”
“우리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네. 강 전무님하고 몇 마디 나눠보니 알겠더라고. 어차피 다 드러날 일이라면 차라리 솔직히 말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네.”
“그러면 덮자고 했을 때, 그 정도 대비도 없이 그랬던 건가?”
“미안하네. 그 정도로 용의주도한 음모꾼이 아니어서. 게다가 강 전무님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어.”
기준은 그 대답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총지배인의 입장은 뭐가 되나? 그리고 총지배인을 그렇게 궁지로 몰아넣으면 리조트는 누가 책임질 건가?”
“결과적으로 잘 된 일 아닌가? 리조트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사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리조트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 김 차장도 모르지는 않을 테지. 그리고 리조트가 실패하면 자네나 나나 다시 실패자가 되는 거 아닌가?”
‘다시 실패자가 된다?’ 기준은 숨이 막혔다.
변형섭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총지배인님을 위해서도 누군가는 악역을 맡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총지배인님에 대해서 그렇게 다 까발린 건가? 이제 원하는 대로 되어서 속이 시원해?” 기준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아, 그런데 미처 몰랐어. 자넨 총지배인 사람이었지. 미안하게 되었네.” 변형섭이 정색을 했다.
“나도 총지배인님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문제를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동의할 수 없어. 불신을 조장하는 것도 모자라 뒤통수까지…….”
기준은 변형섭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뒤통수? 잘못을 고치는 게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보였다면 할 말 없네.” 뒤통수라는 말에 변형섭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방법이 틀렸잖아!” 기준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방법? 어디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말해봐.”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려는데 안젤라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