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5회
그때 직원이 다가와 기준을 숙소로 안내했다. 리조트 공사장 옆에 임시로 지은 라오스 전통 목조 가옥이었다. 가구는 침대 하나와 간이책상, 옷걸이가 전부였지만 나름대로 아늑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공사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창문이 마음에 들었다.
여장을 풀고 침대에 걸터앉자 피로가 몰려왔다. 창밖으로는 루앙이 다시 방갈로 지붕에 올라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기준은 침대에 반쯤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젤라….’
지난 날 안젤라와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작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자 서운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더구나 수년 간 동남아의 산간 오지마을만 전전하며 살아가는 그녀가 이 낙원 같은 리조트와 아주 밀접한 관계였다는 사실도 마냥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생각은 곧 발등에 떨어진 임무로 옮겨갔다.
시설부 매니저…, 사실 아주 낯선 직책은 아니었다. 여행사 직원이 되기 전에 그는 건설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유난히 ‘공간’에 대한 애착이 컸다. 상상 속에서 건물을 짓고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마을을 건설하는 것은 기준만의 ‘호사스러운’ 취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바로 그런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30분 후 기준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팀장 급 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기준은 변형섭 옆자리에 엉덩이를 반쯤 걸쳤다. 분위기는 한없이 무거웠다.
“복구 작업이 끝나는 대로 다들 피해 구역 정상화에 힘을 쏟도록. 호텔은 정상적으로 오픈해야 돼.”
총지배인의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 들어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기준은 표정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지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비단 새벽의 물난리 때문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친 표정 뒤에는 총지배인에 대한 불신과 반감, 심지어는 조소의 느낌마저 있었다. 물론 기준만의 느낌일 뿐이지만 적어도 호의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준은 지금 시점에서 호텔 개관 날짜를 지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지 의문이 들었다. 엄청난 폭우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누수가 발생했다면 전체 건물을 대상으로 누수 탐지 작업을 해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포착되면 배관 교체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기준의 짐작으로는 단지 배관에만 이상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변형섭이 입을 열었다.
“호텔 시공 팀을 다시 불러서 정식으로 보수 공사를 해야 합니다. 레스토랑은 인테리어부터 다시 해야 할 상황이고, 객실 천정이며 외벽도 손질해야 하는데….”
“시공사에는 벌써 연락했네. 다 아는 얘긴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나? 아무튼 보수 공사에 관해서는 별도로 대책회의를 열도록 하지. 모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호텔 개관 일정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테니 계획했던 대로 밀고나가자는 거야. 이제 곧 우기가 끝나고 성수기가 시작될 텐데, 모두들 잘 알다시피 경쟁사인 무사오 리조트는 이미 100% 예약을 마쳐놓은 상태 아닌가. 이번에 오픈하지 못하면 우리는 성수기를 놓치게 될 테고, 결국 1년을 허비하게 되는 셈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변형섭이 일어섰다.
“성수기에 맞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시간에 쫓겨 무리하게 오픈했다가 더 큰 피해를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일순 총지배인과 변형섭의 시선이 강렬하게 마주쳤다.
그때 갑자기 회의실 조명이 깜빡깜빡하더니 꺼져버렸다. 밖에서 윙윙, 돌아가던 기계 소리도 스르르 멈추더니 한 순간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또 말썽이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가운데 직원 하나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전입니다. 그리고 수도관에도 이상이 생겼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흙탕물만 나옵니다.”
부서진 배관으로 빗물과 진흙이 유입된 것이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총지배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상수도관 파열인 모양이군. 변 차장, 건설국에 연락해보게. 아니, 전화로 될 일이 아니야. 가서 얼굴 보고 직접 얘기하게.”
총지배인이 변형섭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기준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덧붙였다.
“자네도 같이 가게.”
“예? 제가요?”
“앞으로 자네도 위앙짠 주정부에 자주 들르게 될 테니 말일세.”
“아니, 전 아직….”
“아무튼 다녀와서 얘기하지.”
총지배인은 일방적으로 말을 끝낸 뒤 일어났다. 그가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직원들은 그제야 참았던 푸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쳇, 혼자 다 저질러놓고 책임은 같이 지자 이거로군.”
어떤 이는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걷어차기도 했다.
기준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호텔 현관을 나왔다. 정원의 야자수 근처에서는 루앙이 인부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기준을 보자 그는 입모양으로 ‘where?’하고 물었다.
“위앙짠.”
루앙은 예상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양반 만나면 부탁하듯이 대하지 마십시오.”
“예?”
“주정부 관리를 만나면 아쉬운 태도보다는 대등하게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인상을 보여야 합니다. 그 양반은 그렇게 대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