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33회

? 청 테이프

성수기가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비 내리는 횟수가 부쩍 늘어가기 시작하더니 아침부터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고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시즌이 끝나면서 평균 40~50% 선을 지키던 객실점유율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물론 예상했던 일이고, 리조트는 비수기의 주요 프로그램이 될 기업 연수단 유치를 대비하기 위해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연수단 유치 작업은 몇 주일 사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서울에서는 무숙자가 업계의 마당발 박 대표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으며 뛰어다닌 결과 총 100여 명으로 구성된 중견기업 직원 연수단의 유치를 성사시켰고, 리조트에서는 추진 팀에 소속된 행사담당 매니저와 식음료 담당 매니저가 맞춤형 프로그램 준비를 시작하고 기준 역시 링크빌리지와 관청 등을 오가며 연수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을 점검했다. 연수단의 봉사활동을 비롯한 야외 활동에서 전반적인 가이드 역할은 본사에서부터 함께 동행을 하는 무숙자가 맡게 되지만 링크빌리지에서는 루앙이 합세해서 돕기로 했다.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항은 라오스 관광청에서 기업연수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인 점이었는데, 왕위앙 지역 개발 담당자를 링크빌리지에 파견하면서 그 곳 공사에 필요한 일부 자재까지 지원해주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관광청이나 주 정부에서 기준의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도 희소식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링크빌리지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이 기준을 더욱 기쁘게 했다. 일단 연수 프로그램 추진을 위한 환경은 우호적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정작 프로젝트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리조트 내부 사정은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카약 투어를 추천한 책임은 당신네들한테 있지 않나요?” 호텔 로비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숙해 있던 미국 청년들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카약 투어를 나섰는데, 술을 마시고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노를 젓다가 그만 배가 뒤집혔던 것이다. 다행히 수심이 얕은 곳이라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물 밑의 날카로운 돌에 찔려 발바닥이 찢어지고 말았다.
사고를 당한 두 명의 청년이 일행에게 업혀 호텔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곧장 리조트내의 의무실로 데려갔다. 그런데 한 명은 간단한 응급치료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어 수술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의무실에서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서둘러 시내에 있는? 왕위앙 병원으로 환자를 실어 보냈다. 그러나 그때부터 다시 소란이 시작되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일행 청년들과 객실에 머물러 있던 동료들이 프런트로 몰려와 호텔 측에 책임을 물으며 병원비는 물론 손해배상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호텔 측에서 충분한 안전 조치가 없이 카약 투어를 추천한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더니 얼마 후에는 리조트 안의 부실한 의료 시설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제기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운터 직원이 그들의 흥분을 돋우고 말았다.
“술을 마시고 카약을 탄 것과 배 위에서 위험한 행동을 자초한 것 모두 본인들의 과오가 아닌가요? 그리고 카약 투어에 대한 책임은 여행사에 있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직원의 대응으로 더욱 흥분하게 된 청년들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고, 다른 투숙객들까지 모여들어 호텔 로비 전체가 소란스럽게 되었다.
결국 변형섭 차장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변형섭이 당사자들을 따로 만나 사태를 수습하고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동안 기준은 카운터 직원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로비에서 손님하고 언쟁을 벌이는 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인 것 같은데?”
기준은 직원을 한 숨 돌리게 한 후에 조용히 말을 건넸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잖아요.”
“내 말은, …… 호텔 로비는 잘잘못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는 거야.”
“그럼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겁니까?”
“우선은 손님을 진정시키고 조용한 데로 옮긴 다음 매니저를 불렀어야지.”
“그 정도 문제는 저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손님하고 싸워서?”
“그 손님이 잘못했잖아요. 왜 자기네들이 잘못해놓고 우리한테 책임을 지라는 거죠?”
“그게 자네 해결책이었어? 다치고 흥분한 손님하고 싸워서 이기는 게?”
직원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분한 듯 거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일단 우리 호텔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손님은 우리 가족이야. 이유야 어찌됐건 가족이 다쳤는데 잘못부터 추궁하는 건 너무하잖아. 놀라고 흥분했을 테니 먼저 다독거려서 진정부터 시켜야지. 만약에 자네가 로비에서 그 손님들하고 싸워 이겼다 쳐. 그 손님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다른 손님들 모두 어떤 생각을 할까? 아, 이 호텔은 우리를 감싸줄 자세가 안 돼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가족이라고요? 가족이라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지 않겠지요.”
기준은 순간, 가족이라는 표현이 직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불쑥 나온 가족이라는 표현은 뭔가 생뚱맞기까지 했다. 기준은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
‘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어제 일로 마음이 조금 무거워진 기준은 코끼리 사육장에 들러 녀석의 안부도 확인할 겸 리조트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햇살이 가려진 날씨는 자못 시원하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산책로 걸으며 간혹 마주치는 현지 직원들에게 습관적으로 ‘안녕하세요, 싸바이디’ 하며 고개를 숙이던 기준은 문득 자신이 그들과 마음으로 소통 할 수 있는 대화라고는 기껏해야 ‘싸바이디’나, 혹은 ‘감사합니다’를 뜻하는 ‘컵짜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기준은 여전히 그들에게 이방인으로 남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기업 연수 프로그램은 어떤 의미일까. 기준이 다소 들뜬 상태에서 기업 연수단 유치에 골몰해 있는 동안 변형섭의 얼굴이 상대적으로 어두웠던 까닭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야외 수영장 입구 쪽으로 다가가는데 변형섭 차장과 방송용 카메라를 든 두 명의 젊은이가 눈에 띄었다.?
“혹시 한국에서 오셨나요?”
기준이 다가가 묻자 그들은 여행 전문 케이블 회사의 피디와 촬영감독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방영될 프로그램은 라오스에 관한 것이지만 협찬금을 지불한 만큼 리조트 사전 홍보 차원에 가깝다고 변 차장이 귀띔을 해주었다. 그는 강전무가 특별히 지시를 해서 리조트 안내를 하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잘 좀 찍어주십시오.”
기준은 촬영 안내를 맡은 담당 직원이 올 때까지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카메라 좀 좋은 걸로 갖고 오시지 그랬어요?”
기준이 촬영감독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농담을 던졌다. 고급 디지털 카메라인 것 같았지만 여기저기 청 테이프가 붙어 있고, 트라이포드 역시 청 테이프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청 테이프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런데 이 청 테이프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영화계나 방송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촬영감독이 모르는 소리 말라는 투로 대답했다.
“설마요?”
“실제로 지금도 대부분의 촬영 팀들에게 이 청 테이프는 필수품 목록 영순위입니다. 트라이포드는 물론이고 조명기구의 집게 역할도 하고 소품 부착용으로도 쓰이지요. 그뿐인가요, 배우들의 위치 지정 마크로도 쓰이고 잘못해서 의상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이 청 테이프입니다. 한 마디로 돌발 상황 때 가장 빨리 대처할 수 있는 위기관리 도구인 셈이죠.”
촬영감독은 가방에서 청 테이프 뭉치를 꺼내들며 호기스럽게 말했다. 옆에 있던 피디도 한 마디 거들었다.
“맞습니다. 한번은 조감독 시켜서 청 테이프의 용도가 몇 가지나 되나 세어보라고 했더니 줄잡아 60가지는 넘는다고 하더군요.”
“60가지라고요?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데요.” 말과는 달리 변 차장은 줄곧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외국 촬영 팀은 현장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작사에 전화 걸어서 체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우린 이럽니다. ‘야, 청 테이프 가져와!’, 그럼 한 방에 해결되죠. 하하.”
모두들 함께 웃다가 기준과 변형섭이 눈이 마주쳤다. ‘청 테이프라…….’
촬영 팀이 작업을 시작한 후 담당 직원에게 업무를 인계한 두 사람은 호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청 테이프로 처리하는 행위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당장 조명기구가 고장 났는데 거기에 꼭 맞는 나사만을 찾아다니다가 그날 촬영을 펑크 내는 것은 꽉 막힌 행동이잖아. 청 테이프 하나로 하루 촬영을 제대로 마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안 그래?”
기준이 청 테이프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나에게는 청 테이프라는 것이 일종의 업무 유연성의 상징처럼 보였어.”
기준이 다시 말을 잇자 변형섭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우리한테도 그런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 말에 동의해. 기존의 라오 프로그램처럼 완벽만을 추구한다고 해서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건 아니더란 말이지?” 변형섭이 이야기를 받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지 않지.” 변형섭이 다시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 시스템이든 조직이든 좀 여유를 두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고층빌딩을 짓는 설계자들은 건물이 조금씩 흔들리도록 설계하지. 그래야 태풍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거든. 만일 그런 유연성이 없다면 모든 저항을 건물이 그대로 흡수하기 때문에 무너지고 말아.” 변형섭이 대답했다.??
“유연성, 바로 그거야. 생각해보니까 유연한 설계로 건물의 내구성을 강화하듯이 조직에서도 그런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쌓이고 연결이 강해질 것 같다.” 기준이 열을 내며 말을 덧붙였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 자기 일에 대한 애정이나 책임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테니까.”
“맞아, 원칙이 없는 유연성은 말장난에 불과할 거야.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의 어떤 단계에서는 유연성이나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지금 그런 유연성이 필요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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