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4회 “신성한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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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과 안젤라는 깜짝 놀랐다. 병상에 누워 있을 줄만 알았던 총지배인이 혼자서 병원 주변을 산책하고 있으니. 그는 휠체어도 없이 자기 발로 걷고 있었다.
“어머!”
안젤라가 달려가려는데 기준이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두 사람은 그대로 멀찌감치 총지배인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곁에 간호인이 조용히 따라 걷고 있었지만 그는 온전히 제 힘만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히 상태가 많이 좋아지셨네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우직한 사내의 영상이 떠올랐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꾹 다문 입술과 생각에 가득 찬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뭉클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이 다가서자 총지배인은 그때서야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걸음을 멈췄다.
“날 말릴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하지만 무리하시면 큰일 나세요.” 안젤라가 삼촌의 팔을 부축하며 눈을 흘겼다.
“병실에 누워있다고 나를 아주 없는 사람처럼 여긴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내줄까봐? 어떻게 일군 리조트인데.” 총지배인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기준과 안젤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매각과 관련된 소문이 벌써 총지배인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더구나 상대가 무사오라니…….” 총지배인이 혀를 찼다.
기준은 일단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찌 말을 꺼낼까 걱정스러웠는데 이미 알고 계신다니 부담을 덜었고, 게다가 예상보다 충격을 덜 받으신 것 같으니 안도감마저 들었다. 총지배인은 두 사람의 걱정이 무색하게 오히려 의지를 가다듬으며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지 않기를 바랐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네.”
“총지배인님, 아직은 무립니다. 완전히 회복한 뒤에 복귀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늦지 않는다고? 자네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린가?”
“매각 협상은 일단 중지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다시…….”
“문제는 협상의 진행 여부가 아니야.”
총지배인의 단호한 말투에 기준은 더 이상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의 회장은 내가 예전에 알던 그 회장이 아니네. 그 양반에게는 모든 게 돈의 논리로만 보이는 모양일세. 리조트에는 영향이 없을 거라 약속했지만, 이제는 그 약속을 믿을 수가 없어.”
그늘막으로 자리를 옮겨 한숨을 돌린 뒤에도 총지배인의 얼굴에서는 한동안 고뇌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기준은 총지배인의 고민의 깊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지 기준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뭔가 깊고 어두운 심연을 본 듯한 느낌만이 강했다. 어두운 표정은 안젤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장이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그게 걱정일세. 아니, 회장이 깨달았다고 하여도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일세.”
“그렇다면 더욱이, 이제 삼촌이 나선다고 해결될 수 있겠어요.” 내내 총지배인의 행동과 안색을 살피던 안젤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복귀해야만 막을 수 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그런 생각 버리기로 하셨잖아요.” 순간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총지배인이 안젤라를 노려보았다.
“본사에도 이미 복귀하겠다고 이야기 했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겠다는데 도대체 왜들 이래!”
기준과 안젤라는 총지배인의 단호한 표정 앞에서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안젤라와 병원에서 헤어진 뒤 기준은 곧장 리조트로 차를 몰았다. 해는 떨어지고 날이 어두워진 국도, 어스름 달빛에 스쳐가는 산등성이를 끼고 달리는 기준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 나올 수 없는 블랙홀로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리조트에 닥친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다. 본사 회장의 문제라면 리조트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는 것일지도. 무성한 잎사귀만을 보고 뿌리를 보지 못하면……. 기준은 무숙자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기준은 변형섭의 숙소를 찾았다. 총지배인의 복귀설은 벌써 기정사실이 되어있었고 갑작스런 복귀는 리조트의 매각 움직임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분명하지도 않은데…….”
매각 관련 소문을 공론화해서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자는 기준의 말에 변형섭은 곤혹스러워했다. 그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게 불확실하지.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아마도 분명해진 다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다음일 거야. 그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소문만을 믿고 어떻게…….”
“소문을 그대로 놔두면 유언비어만 확산될 뿐이야.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려면 눈을 돌려서는 안 돼.”
“날아오는 공이 무서워 시선을 피하면 안타를 칠 수 없지.” 긴장이 되는지 형섭이 웃음으로 말을 받았다.
“위기 뒤에 진화하느냐 도태되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고 봐. 결국은 본사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처분만 기다릴 수는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총지배인님께서는 뭐라고 하셔?”
기준 자신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총지배인의 몇 마디를 전해준 다음에야 형섭은 기준의 제안에 동의했다.
“본사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절차를 논의한 바가 없어. 그러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건 이 리조트의 잠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아닐까. 무사오 리조트와는 다른 우리만의 가치 말이야.” 변형섭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만의 가치? 그래 바로 그거야.” 기준은 형섭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무사오 리조트 소식 들었어?”
“어떤 소식?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나?”
변형섭이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방송에서 방영된 유명 다큐멘터리에서 ‘라오스의 개발과 한계’라는 이슈가 다루어졌는데, 라오스에 진출한 해외 투자국들이 개발 사업에만 치중하느라 정작 라오스 국민들은 오히려 소외되고 있다며 대표적으로 무사오 리조트가 언급된 이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지역 개발이라는 이름의 침공’, 혹은 ‘친구인가 정복자인가?’라는 자극적인 내용 탓인지 무사오 리조트는 기업 이미지뿐만 아니라 골프와 카지노 영업, 게다가 호텔예약률까지 큰 타격을 받았다. 다급해진 무사오 측은 긴급회의를 통해 일대 혁신을 꾀했고 그 결과 에코리조트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겠어? 잠시 여론을 잠재울 기회만 엿보는 거겠지.”
“그런 이유로 우리 리조트를 인수하겠다는 건가?”
“장기적인 플랜이지. 무사오 측의 중국자본은 왕위앙뿐만 아니라 라오스 전반에 걸쳐 독점 전략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지나치게 공격적인 확대 정책이 오히려 자기들의 발목을 잡을 텐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기준은 과연 매각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화에서 무숙자는 자기가 판단하는 그룹의 상황은 한마디로 오리무중, 짙은 안개 속의 암중모색이라고 표현했다. 꼭 부정적인 뉘앙스만은 아니었고, 기준을 안심시키기 위해 숨기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몇 번 그랬듯이 이번에도 회장의 뛰어난 승부근성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멋지게 도약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리조트 매각 논의는 아예 없던 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업계에서는 실제로 그런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그룹의 형편은 운 좋게 기사회생할 수도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추락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협상의 상대가 무사오 리조트라니 더더욱 머리가 복잡해진다. 게다가 골프, 카지노 투어 등에 주목하면서 거의 모든 면에서 무사오 리조트와 동조 전략을 채택해온 강 전무는 또 어떤 입장을 보일 것인지, 그리고 총지배인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두 사람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밤이 새도록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쉽게 찾아질 리야. 기준에게는 진정한 통찰, 생각을 뒤집고 틀을 깨는 ‘매직 인사이트’가 필요했다. 일차적으로는 직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리조트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모든 투자자들도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튿날 새벽, 겨우 잠이 들었던 기준은 어디선가 맹렬하게 두들기는 북소리에 선 잠을 깼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이번에는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누구지?”
“저, 쏭입니다.”
시계를 보니 아직 한 밤 중이라 할 만큼 이른 새벽이었다.
“어서 나오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기준은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어두움도 채 걷히지 않은 미명에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직원들이 모두들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일제히 줄지어 앉아 있었다. 마치 새벽 공양을 준비하기라도 하듯.
“코끼리가 있는 곳을 알았어요. 어서 출발하세요.”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사람들은 엄숙한 예식을 치르듯 사박사박 잰걸음으로 새벽길을 나섰다. 길을 따라 한참을 가는데 언제부터인지 기준의 일행 뒤로 주황색 가사 행렬이 뒤따랐다. 그들 역시 모두 맨발이었다.
부지런히 길을 가던 쏭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끝없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을 뿐 기척이 없었다. 기준은 저 멀리 안개 속, 신성한 언덕 위 무성한 나무들 사이에서 은은한 광채가 솟아 오르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의 크고 작은 사원이 일행 뒤로 하나 둘 지나갔다. 기준은 조급해졌다. 해가 뜨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황금색 지붕이 여명을 받아 반짝이는 곳, 가장 빛나는 그곳에 코끼리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해가 뜨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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