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3회 “나무로 만든 닭”

몇 주 사이 링크빌리지는 모습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주차장용 공터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새로이 정비된 부지와 그 위에 조립식으로 지어지고 있는 여러 채의 건물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현장에는 마을 사람들 외에 서양인들을 비롯한 외지인들이 여럿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지붕과 벽체만 어설프게 서있는 상태이지만 불과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외부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위한 숙소로 쓰이던 통나무집 한 채만 덩그마니 서있던 장소였는데 이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숙소로 변모되고 있었다. 햇살이 퍼진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주민회관 겸 사무실이 보이고 그 대각선 쪽으로는 기준 쪽의 기업연수단 일행도 건축에 힘을 보탰던 청소년센터 건물이 밝은 색 페인트로 단장한 채 아담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 뒤로 어스름 대숲을 끼고 돌아가면 병원과 진료실이 있을 것이고 아마도 안젤라는 그 곳에 있으리라. 기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루앙이 예전에 보여준 마을 설계도가 겹쳐졌다. 주의해서 둘러보니 루앙의 계획은 하나하나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모양을 갖춰가는군요.”
“여러분들이 뜻을 함께 해주시고 힘을 모아 주시는 덕분이지요.” 루앙이 반갑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설계도에 그렸던 생각들이 하나둘 실현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시겠어요.”
“그저 하루하루 할 일을 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조금씩 모양이 갖춰지네요.” 계획을 짜고 구상을 하는 것은 주로 자신의 몫이지만 실제로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대부분 안젤라의 공이라고 했다.
“저는 늘 생각이 많지요.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측면에 집착하게 되고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안젤라는 걱정만 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 대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지요.”
마을의 거리에는 울긋불긋 화려한 색깔의 닭들이 이리저리 쏘다녔다. 크고 작은 한 떼의 병아리가 광장 쪽으로 몰려가자 마중이라도 나오는지 코흘리개 발가숭이 아이들이 때 맞춰 우르르 뛰어나왔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내 두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 붙었다. 구구거리는 병아리 소리에다 조잘대는 아이들의 소리까지 더해져 시끄러운 소음에 두 사람은 대화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준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해졌다. 기준은 자신이 왜 이곳을 부리나케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젤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다급한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요?” 루앙이 넌지시 물었다.
“좋은 일이요?”
“미소를 띠고 계시니 보기에 좋습니다.”
기준은 그때서야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 것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닭을 쫓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닭을 참 좋아합니다.” 루앙이 몇 걸음 앞에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걸어가는, 검붉은 깃털을 가진 닭을 가리켰다.
“저 녀석이 무리의 우두머리이지요. 어딘지 위엄이 있어 보이지 않나요?”
루앙의 말을 듣고 보아서 그런지 아니면 뒤를 따르는 졸개 닭들 때문인지 어딘가 다른 면모가 있어보였다.
“닭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기준이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녀석이 횃대에 올라 몇 시간이고 꼼짝도 않으면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나머지 닭들이 모두 제 자리를 찾아가요. 마치 제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들처럼 말이죠.”
루앙이 가리키는 닭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닭의 어디에서도 그런 느낌을 찾기 어려웠고 다른 닭에 비해 오히려 깃털도 화려하지 않고 볼품도 없어 보였다. 루앙이 말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을 보면 저 녀석이야말로 나무로 만든 닭이 아닌가 싶지요.”
“나무로 만든 닭이요?”
“네, 겉으로 보면 특별히 다른 닭에 비해 힘이 세지도 유난히 빛나는 깃털이나 매서운 눈초리도 없어요. 하지만 다른 닭들이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지요.”
“아하, 장자에 나오는 목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준이 웃었다.
“역시, 아시는군요. 이따금씩 저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완전히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무리를 이끌어가는 그런 경지를 발견합니다.” 루앙은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평소에는 뛰어난 점이 없어 보이지만, 녀석의 진가는 산짐승이 닭 우리를 공격할 때 발휘됩니다. 닭들이 놀라고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치며 소란할 때 녀석은 홀로 횃대에 올라 주위를 지긋하게 바라봅니다. 절대로 조급하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공격하는 상대방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나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자에 쉽게 반응하지 않지요.”
“정말 그렇다면 대단한 닭이군요. 저도 한 수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제일이라고 교만하지도 않고, 적의 위협에 쉽게 흔들리지도 않으며, 상대에 대해 공격적인 대응마저 자제할 줄 아는 경지를 갖춤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는다. 루앙으로부터 ‘목계지덕(木鷄之德)’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기준은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 아직 분명하게 결정된 것도 없는데 기준은 마치 리조트가 당장 매각이라도 되는 양 흥분했었던 것이다.

안젤라는 대나무 숲 근처에 증축된 진료센터에서 서양인 남녀 의사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대화를 얼핏 들어보니 의사들은 대개 두 편으로 나뉘어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데 안젤라는 양쪽의 주장에 대해서 일종의 중재 역할을 담당 하고 있었다. 기준은 토론이 끝나기를 기다려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동남아 지역에 파견된 국제 의료협동조합의 봉사자들이에요. 여기서 열흘간 머물기로 했어요.”
기준이 어떻게 본론을 꺼낼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안젤라의 말이 이어졌다.
“의사들 말이에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묘하게도 두 부류로 나뉘곤 해요.”
“어떻게?”
“짐 풀자마자 환자들부터 돌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선은 주민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친구가 되려는 사람이 있죠.”
“차이가 좀 있네. 어느 쪽이 더 좋은 건가?”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는 건 내 몫이 아니에요. 마을에 그리 심하지 않은 복통을 앓는 주민이 있다고 해보죠. 한 그룹은 진단을 내리자마자 주사기를 꺼내들지만 다른 그룹은 마을의 원로를 만나 함께 숲으로 들어가죠.”
“숲으로?”
“숲에서 약초를 캐오더니 민간요법을 실시하더군요. 첫 번째 그룹은 그런 태도를 못마땅해 하지요. 하지만 그들도 두 번째 그룹의 의견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어요. 주민들에게 응급 처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들 방식에 맞는 전통 치료법을 존중해야 하니까요. 대대로 내려오는 민간요법 중에서는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치료법이 많거든요.”
“그럼 두 번째 방식을 정식화시키는 게 어때? 매번 쓸데없는 논쟁을 할 게 아니라.”
“쓸데없다니?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논쟁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데. 만일 두 번째 방식을 제도로 채택한다고 쳐요. 그럼 나중에 오는 의사들은 그냥 자동적으로 그 제도에 익숙해지지 않겠어요? 왜 그 방법을 쓰는지에 대해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과정도 모르는 채 말이에요. 게다가 일단 채택된 제도는 관성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다시 바꾸기 힘들잖아요.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유일하면서도 완벽한 방법이란 게 있을까? 나는 없다고 봐요. 그러니까 끝없이 부딪히면서 개선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지.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봐요.”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한 과정이라…….”
“대화는 참여의 첫걸음이잖아요. 토론이 조직의 문화로 정착된다면 구성원들 개인의 지식은 물론 집단의 지식도 쌓이겠지만 무엇보다 조직을 위한 자기 역할의 의미를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자기 의견이나 지식이 조직에 반영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짜릿하죠. 아, 나는 정말 쓸모가 있는 존재구나 하는 느낌이랄까. 그게 우리 링크빌리지 마을의 원칙 아닌가요?”
두 사람의 이야기에 루앙이 끼어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간에 투명한 소통이 전제가 되어야겠지요.”
“투명한 소통?”
기준이 되물었다. 그러자 루앙은 손가락을 들어 안젤라의 야외 진료소를 가리켰다.
“그래서 저기 힐링 센터에는 문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안젤라?”
“처음 의료 활동을 시작할 때 저는 진료실 문을 꼭꼭 닫곤 했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들이 치료할 때보다 닫힌 방문 밖에서 기다릴 때 더 불안해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 방문을 활짝 열었죠. 그리고 왜 아프게 되었는지, 병이 생기게 된 원인과 생활 습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진료 과정을 최대한 모두에게 공개한 거죠. 그때 알게 되었어요. 치료의 절반은 대화라는 것을. 저는 치료라기보다는 힐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곳도 힐링센터라는 이름을 붙였고요.”
“병이란 일방적으로 의사가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더불어 알고, 또 함께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것, 맞습니까?”
“맞아요. 여기서도 협동이 필요하네요.” 안젤라가 미소를 지었다.
“힐링의 첫째 조건은 소통이고, 소통은 투명성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군요.” 루앙이 토론을 정리하듯이 말했다.
기준은 이제 오늘 방문의 이유를 꺼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리조트에 대한 매각 소문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루앙과 안젤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준은 그 침묵이 곤혹스러웠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무숙자가 수시로 연락해 줄 텐데, 문제는 총지배인님이야.” 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직원들이 알고 있다면 총지배인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일단 막아야 돼요. 아니, 가능한 한 늦춰야 돼요.” 루앙의 말에 안젤라가 신음소리처럼 내뱉었다. 총지배인의 건강 상태를 생각할 때 당연한 반응이었다.
“뭐를? 총지배인님이 알게 되는 거, 아니면 매각의 진행을?”
기준은 자신의 힘으로는 두 가지 모두 해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은 이미 자신의 통제권 밖에서 진행되고 있다. 시시각각 모든 주파수를 리조트에만 맞춰놓고 지내는 총지배인에게 소문이 비껴갈 리도 없고, 본사에서 이미 매각 움직임이 시작됐다면 그 역시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예 다 공개하는 건 어떨까요?” 루앙의 의견이었다.
“모두 공개를요?”
“총지배인님에게도,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공개하는 겁니다. 나쁜 소문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소문 그 자체가 아닐까요? 특히 여럿의 힘이 필요할 때는 더욱 그렇지요. 소문이 생긴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뭐든 막히고 숨기고 가려졌을 때 소문이 생기는 법이지요. 소문을 없애는 방법은 오픈시키는 것 뿐입니다.”
“직원들,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기준이 혼잣말처럼 우물거렸다.
“그 대신 함께 해결하고 극복해나갈 기회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루앙의 말이 맞아요.” 기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젤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한 라오 커피 한 잔을 청해서 마신 후 기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기 전에 떠나기로 했다.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온 루앙이 기준에게 물었다.
“코끼리는 돌아왔나요?”
“아직 소식을 모릅니다.”
“영영 그 곳을 떠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 무슨 뜻인지?”
“제 친척들이 모두 그 부근에 묻혀있거든요. 그 녀석은 아마도 제 어미와 친척들이 묻힌 곳을 아주 떠나지는 않을 겁니다. 순전히 제 바람이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코끼리들이 죽은 지는 이미 2~3년이 넘은 걸로 아는데요.”
“코끼리는 어미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나도 제 어미의 뼈가 남아있는 곳을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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